CEPR와 토리노대 싱크탱크의 보고서 「블록체인은 화폐·계약·금융을 탈중앙화할 수 있는가」(브뤼노 비아 교수 등, 2026년 2월)는 화폐 편에서 스테이블코인의 '재중앙화'를 경고했다. 그러나 더 서늘한 진단은 금융 편, 즉 탈중앙금융(DeFi) 부분에 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중개자를 없애려고 만든 블록체인이, 새로운 종류의 중개자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중개자는 소수에 극도로 쏠려 있다 — 결국 다시 중앙화로 돌아간 셈이다."
■ 사라진 줄 알았던 병폐가 '새 이름'으로 돌아왔다
전통 금융시장의 고질병은 크게 두 가지다. 정보가 많은 상대에게 당하는 손실, 그리고 남의 주문을 미리 가로채는 새치기 매매다. 보고서는 DeFi가 이 둘을 없애기는커녕 새 이름으로 되살렸다고 본다.
첫째, 정보 격차에서 오는 손실. 유니스왑이 2018년 선보인 자동 거래 시스템(AMM)은, 사람 대신 알고리즘이 정해진 공식대로 가격을 매겨 거래를 체결한다. 이 시스템에 자기 코인을 넣어두는 사람을 '유동성 공급자'라고 부른다. 그런데 사람 중개인이 사라진 자리에서도, 정보가 빠른 트레이더에게 유동성 공급자가 입는 손실은 그대로 남는다. 크립토 업계는 이를 '임퍼머넌트 로스(비영구적 손실)'라고 부르지만, 금융이론에서 보면 그저 오래된 '정보 격차 손실'이다. 새 용어, 같은 병이다.
둘째, 새치기 매매. 더 노골적이다. 가령 A가 코인 매수 주문을 내면, 그 주문은 체결되기 전에 누구나 들여다볼 수 있는 대기열(멤풀)에 잠시 쌓인다. 이를 지켜보던 봇이 봇 매수 → A 매수(더 비싼 값) → 봇 매도 순서로 거래 순번을 짜면, 봇은 차익을 챙기고 그 차익만큼 A는 손해를 본다. 마치 식빵 사이에 끼우듯 남의 주문을 위아래로 감싼다고 해서 '샌드위치 공격'이라 부른다.
보고서는 이렇게 빼낼 수 있는 이익 전체를 MEV(최대 추출 가치)라 부르며, 결정적 단서를 단다. "이 '가치'는 새치기하는 쪽에는 이익이지만 피해자에게는 비용일 뿐, 사회 전체로는 어떤 가치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더 나아가 이런 새치기가 심해지면 정직한 투자자들이 거래 자체를 포기해 시장이 마비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누구나 거래 내역을 볼 수 있다는 블록체인의 장점이, 역설적으로 약탈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 '블록을 짜는 회사'의 등장 — 그리고 상위 3곳의 93.19%
가장 강력한 데이터는 여기에 있다. 보고서는 탈중앙의 상징이던 이더리움이 어떻게 새로운 쏠림을 낳았는지 추적한다.
2022년 이더리움이 운영 방식을 바꾸면서(채굴 경쟁 방식 → 코인을 맡기고 검증에 참여하는 방식) 결정적 변화가 생겼다. 예전에는 다음 블록을 누가 만들지 미리 알 수 없어 경쟁이 있었지만, 바뀐 방식에서는 그 순서가 미리 정해진다. 그 순간만큼은 정해진 참여자가 사실상 독점권을 갖는 셈이다.
이 틈에서 '블록을 짜는 전문 업체(빌더)'라는 새 중개자가 등장했다. 빌더는 거래들을 모아 블록을 만든 뒤, 그 블록을 채택해 달라며 수수료를 써내는 경매에 뛰어든다. 문제는 이 경쟁에 규모가 클수록 유리한 구조가 작동한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거래가 1등 빌더에게 몰릴 거라고 예상되면, 모두가 1등 빌더에게 거래를 보내는 게 합리적이 된다. 쏠림이 쏠림을 부르는 것이다.
숫자로 보는 핵심 · 이더리움 블록을 짜는 상위 3개 업체의 점유율 = 93.19% · 기준 시점: 2025년 11월 10일 (자료: 분석업체 Rated) · 검열 저항성과 탈중앙을 표방한 네트워크의 블록 생산이, 사실상 단 3곳에 수렴
보고서의 표현을 빌리면, 중개자를 없애려던 운동이 "다시 중앙화로 돌아간" 셈이다. 탈중앙은 이념이지만, 쏠림은 경제법칙의 귀결이라는 점을 이 93%라는 숫자가 보여준다.
■ 실물자산 토큰화의 함정 — 보이차·금·부동산을 토큰으로 만들어도, '연결 장치'가 다시 중앙화를 부른다
DeFi뿐 아니라 실물자산을 토큰으로 만드는 작업(RWA 토큰화)에도 같은 함정이 도사린다. 보고서는 채권·주식·부동산·미술품·고급 와인·금·원유까지 토큰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결정적 한계를 짚는다.
블록체인 위의 자동 계약(스마트 컨트랙트)은 블록체인 안에 있는 것을 다룰 때만 강력하다. 'A의 집 토큰을 B에게 넘기면 현실의 소유권도 넘어가는가, 법원이 이를 인정하는가, 공증이 필요한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자동화가 멈춘다. 바깥세상 정보를 블록체인 안으로 들여오려면 '연결 장치(오라클)'가 필요한데, 그 연결 장치를 어느 한 회사가 쥐고 있다면 — 블록체인이 피하려던 '믿어야 할 중개자'가 다시 들어온다.
보고서가 든 사례가 통렬하다. 인도 안드라프라데시주는 토지 소유권을 블록체인에 등록했지만, 소유권을 넘길 때는 공무원이 자기 열쇠(개인키)로 직접 입력해야 한다. 장부는 블록체인 위에 있어도, 진실을 보증하는 권한은 여전히 정부라는 중앙 권력의 손에 있는 것이다. 토큰을 만든 것만으로 탈중앙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명백한 증거다.
■ 한국 시사점 — 토큰증권·조각투자, 그리고 '탈중앙 서사'의 재점검
이 보고서는 한국의 두 흐름에 직접적인 질문을 던진다.
첫째, 토큰증권(STO)과 조각투자. 국내에서는 보이차·금·음악 저작권·부동산을 잘게 쪼개 토큰으로 만드는 실험과 토큰증권 입법이 동시에 진행 중이다. 보고서의 메시지는 명료하다. 실물자산 토큰화의 진짜 난제는 '토큰을 발행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권리를 어떻게 보증하느냐', 즉 법적 효력과 정보 공시, 연결 장치의 신뢰성이다. 자산을 토큰으로 쪼개는 기술보다, 그 토큰이 현실의 권리와 어긋날 때(예컨대 같은 자산이 따로 팔리는 경우) 누가 어떻게 바로잡느냐가 훨씬 어렵다. 한국의 조각투자 거래 제도가 가격 구조만큼이나 '토큰과 권리의 일치'를 보증할 법·감독 장치에 무게를 둬야 하는 이유다.
둘째, '탈중앙' 서사의 점검. 국내 블록체인 담론은 종종 '탈중앙'을 무조건 좋은 것으로 전제한다. 그러나 93.19%라는 쏠림 수치는, 탈중앙 기술 위에서도 경제적 쏠림이 필연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보여준다. 투자자 보호와 시장 건전성을 논할 때, '탈중앙이라서 안전하다'는 명제는 검증 대상이지 출발점이 아니다.
토론에 참여한 장-샤를 로셰(툴루즈경제대) 교수는 더 근본적인 회의를 던졌다. "장부란 본래 중앙화된 것이다. 도대체 누가 '흩어진 장부'를 원하는가." 그의 진단에 따르면 진짜 문제는 중앙화 자체가 아니라 중개자가 챙기는 과도한 이익이며, 블록체인의 진짜 시험대는 규모의 이점을 해치지 않으면서 그 과도한 이익을 걷어낼 수 있는가에 있다. 임퍼머넌트 로스, 새치기 매매, 블록 업체 쏠림은 그 시험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중간 성적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