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은 단순히 업무의 효율을 높이는 기술을 넘어 인류의 가치, 정체성, 의미의 방식까지 바꾸고 있다. 인간만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사고력과 창의성을 기계가 흉내내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 앞에 다시 서게 됐다. 이 변화는 예측 불가능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넘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를 재정의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기계가 인간의 언어와 논리를 학습하고, 우리의 창작물을 모방해 결과를 도출하는 지금, AI는 인간의 거울처럼 기능한다. 하지만 이 거울은 단순한 반사를 넘어서 왜곡된 형태로 우리를 다시 보여주며, 때로는 그 왜곡이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오픈AI의 최고경영자(CEO) 샘 알트먼(Sam Altman)은 Z세대와 밀레니얼들이 챗봇을 ‘인생 조언자’로 활용하고 있다고 언급하며, AI가 인간 정체성의 일부로 점점 자리잡고 있음을 시사했다.
그러나 이러한 ‘거울’은 완벽하지 않다. AI는 우리의 사고방식을 기반으로 훈련되지만, 통계적 확률 계산과 알고리즘적 편향을 통해 출력된다. 심리학자 일레인 라이언(Elaine Ryan)은 “사람들이 단지 일자리를 잃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마저 상실하고 있다고 느낀다”고 지적하며, 이 시대의 혼란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시스템이 흔들리고 있음을 반영한다고 강조했다.
의학, 교육, 예술 등 다양한 영역에서 AI가 인간의 역량을 보완하거나 대체하면서, 우리의 역할은 더욱 모호해지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SFT)는 최근 ‘MAI-DxO’라는 다수 AI 모델이 협업하여 집단 임상 판단을 수행하는 시스템을 개발했으며, 이는 경험 많은 의사들의 진단 정확도보다 4배 더 높은 결과를 냈다고 밝혔다. 이러한 기술적 도약은 인간 중심의 시스템이 얼마나 급속히 재편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미 몇몇 스타트업은 사람을 고용하는 대신 AI 에이전트를 전면 도입하겠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으며, 미국의 컨설팅 기업 KPMG는 설문조사 결과 대다수 기업이 AI를 중심으로 조직 재편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은 이제 ‘AI를 쓸지 여부’가 아니라 ‘얼마나 빠르게 구현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사회적 의미에 대한 재정의가 절실해진 가운데, 미국 상원의원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는 “사람들이 기본소득을 받는다고 해도 삶의 의미가 없으면 소용없다”고 언급했다. 이 말은 기술 발전으로 인해 물질적 풍요는 가능해지더라도, 정신적·사회적 기반이 없으면 인간은 여전히 공허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우리가 향하는 목표는 단순히 AI를 똑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목적을 보존하는 ‘인간 항구’를 구축하는 데 있다. 이는 비유 이상의 것이며, 실질적인 제도, 교육 시스템, 공공 인프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 기본소득과 의료, 교육, 보육 제공과 같은 사회적 안전망 구축은 기술 변화로 인해 흔들리는 중산층과 노동계층을 지지하는 기반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항구가 형성되기 위해선 미국 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매사추세츠공대(MIT)의 경제학자 데이비드 오터(David Autor)는 “국가의 부는 늘어나지만 사회의 관대함은 그렇지 않다”고 지적하며, AI 시대가 제대로 된 사회 안전망 없이 진행될 경우 ‘매드맥스’와 같은 디스토피아적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경고를 내놓았다.
따라서 정부의 역할도 중대하다. AI 혁신을 촉진하는 동시에 인간의 권리와 안전을 보장하는 장치도 마련해야 한다. 투명성, 개인정보 보호, 선택권 등을 확보하고, AI의 통제불능적인 확산과 글로벌 경쟁이 인류 전체의 위협으로 번지지 않도록 규제할 필요가 있다.
결국, 이 복잡하고 불확실한 경로를 지나 우리는 새로운 인간 정체성과 사회적 기초를 함께 재구성해가야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경계해야 할 대상은 기계가 아니라, 인간성의 해체다. 인간 항구의 건설은 공감, 책임, 공동체 정신이라는 실질적 힘으로 완성될 수 있다. 우리가 이 여정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미래는 우리의 가치를 되살리는 기회로 바뀔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