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케어AI, 15조 투자에도 '병원 신뢰' 못 얻는다…속도보다 시간의 가치 절실

| 김민준 기자

헬스케어 AI 시장에 대한 투자 열풍이 거세지는 가운데, 진정한 혁신을 위한 ‘시간’의 가치가 외면받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글로벌 투자 규모는 올해에만 107억 달러(약 15조 4,000억 원)를 넘기며 전년 수준을 크게 웃돌았지만, 정작 산업의 핵심인 임상 통합과 시스템 변화는 여전히 더딘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평가다.

블러드GPT의 CEO이자 헬스케어 전략가로 활동 중인 조너선 크론(Jonathan Kron)은 "이전과 달리 규제 중심의 채택 사이클을 갖는 헬스케어 분야에서 투자자의 조급한 수익 확보 압박이 오히려 구조적 혁신을 저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소비자 기술에서는 '속도'가 경쟁력이 되지만, 의료체계에서는 '신뢰', '검증', '호환성 확보'가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전제돼야 효과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베세머 벤처 파트너스가 발표한 '2025 헬스케어 AI 채택지수'에 따르면, 대부분의 병원과 클리닉들이 AI 솔루션을 테스트하고 있지만 실제 정식 도입으로 이어지는 프로젝트는 10개 중 3건에 불과하다. 이는 벤처 캐피털의 '속도'와 의료현장의 '수용 능력' 사이에 깊은 간극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실리콘밸리에서 자주 목격되는 ‘바이럴 성장’ 모델은 헬스케어에선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크론은 "방법론이 아닌 속도에 초점을 두면, 스타트업들은 임상에 필요한 인프라보다는 대시보드 상의 지표에 집중하게 된다"며 "결국 고비용, 고소음 구조만 남고 의미 있는 변화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런 상황을 반영하듯 최근 'AI 웰니스' 부문이 과도한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시장에 빠르게 진입할 수 있고 규제 부담도 적으며, 투자자를 끌어들이기 쉬운 특성 덕분에 빠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진단과 임상 지원 등 ‘AI 임상’ 범주의 기업들처럼 견고한 IP와 규제 기반 방어력을 갖추긴 어렵다. 전문가들은 향후 5년 내 이 두 분야 사이에서 밸류에이션 디커플링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장기 생존을 도모하는 창업자라면 ‘도입에 최적화된 설계’가 필요하다. 병원 시스템 내 기존 워크플로우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기술이야말로 경쟁자를 앞설 수 있는 방식이다. 임상 결과와 규제 요건을 중심으로 스토리를 설계한 기업일수록 병원이 신뢰하고 오래 사용하는 제품으로 정착할 수 있다.

투자자 역시 단기 수익보다 ‘신뢰 자본’을 축적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아무리 정교한 알고리즘이라 하더라도 임상의 신뢰를 얻지 못하면 현장에서는 외면당한다. 장기적 통합을 전제로 한 투자 전략만이 향후 헬스케어 AI 인프라를 장악할 수 있게 할 것이라는 진단이 나온다.

크론은 “헬스케어 AI 분야에서 최고의 수익률은 처음의 붐이 아니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두가 의존하게 되는 기반 시스템에서 나온다”며 “그 시간을 견딜 수 있는 인내심 있는 자본만이 미래를 소유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