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8월 19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제2차 전체회의에서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도입에 대한 한국은행의 공식 입장을 밝혔다. 그는 “디지털 경제로의 전환 속에서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도입은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면서도, “도입 방식은 은행 중심으로 점진적으로 이뤄져야 하며, 섣부른 비은행 발행은 다양한 금융안정 리스크를 초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스마트 계약 기능, 미래 화폐의 핵심”
이 총재는 화폐의 디지털화 흐름을 언급하며, 스테이블코인에 '프로그램 기능'이 포함돼야 할 필요성을 설명했다. 그는 “기존에도 은행 간 자금 이동은 디지털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지만, 향후에는 여기에 계약 이행 조건을 자동화하는 ‘스마트 컨트랙트’ 기능이 포함돼야 한다”며, “수출입, 부동산 거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조건부 지급이 가능한 화폐가 필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를 통해 “단순한 지급 수단을 넘어, 계약 조건을 내장할 수 있는 형태의 디지털 화폐가 미래 금융 인프라의 핵심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비은행 발행, 규제 사각지대 우려…KYC·AML 감시 어렵다”
스테이블코인의 발행 주체를 둘러싼 논의에 대해 이 총재는 “은행이 중심이 돼야 하며, 일정 규모 이상의 기관만이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은행 금융기관의 참여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기술 혁신과 분산원장기술(DLT)의 투명성을 강조하지만, 한국은행은 자금세탁(KYC·AML)과 같은 금융 규제 이행의 어려움을 우려하고 있다.
그는 “DLT 기술을 활용하더라도 소규모 사업자가 참여할 경우, 인센티브 문제로 규제 회피가 발생할 수 있다”며, “자본금이 낮은 기업이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게 되면 자금세탁 등 불법 행위에 노출될 위험이 커진다”고 지적했다.
“비은행 발행은 사실상 지급결제은행 허용…금산분리 원칙 위배 소지”
비은행 금융기관의 발행이 현실화될 경우, 이는 사실상 '내로우 뱅크'(narrow banking) 혹은 지급결제 전문은행 설립을 허용하는 것과 같다는 점도 지적했다. 이 총재는 “과거 우리가 지급결제은행을 허용하지 않았던 이유는 은행 산업 구조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며, “보험사나 증권사가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게 되면, 은행의 예금 기반이 위축되고 금융시장의 독과점 구조가 심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원화 기반 해외 유통 시 자본 유출 위험…자본자유화에 역행”
특히 자본자유화와 관련한 우려가 크게 제기됐다. 이 총재는 “외국인이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사는 것도 문제지만, 내국인이 이를 해외 네트워크에서 보유하게 될 경우, 이는 곧 원화 예금의 해외 유출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재는 연간 10만 달러 이내의 외화 반출만 허용되고 있지만,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사실상 무제한 자본이 외부로 빠져나갈 수 있다”며, “이는 한국이 수십 년간 유지해온 외환관리 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통화정책 유효성 저해…준비금 조정 어려워져”
통화정책 측면에서도 비은행 스테이블코인 발행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밝혔다. 그는 “은행은 지급준비율을 통해 통화량 조절이 가능하지만, 비은행 발행분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통제가 어렵다”며, “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질 경우, 통화량 축소를 위해 비은행에 채권 매각을 요구하게 되면 시장 충격이 클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강 프로젝트 통해 은행 중심 실험 중…가상자산 제도화 이후 단계적 확대 필요”
한국은행은 현재 '한강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은행 중심의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실험 중이다. 이 총재는 “은행 네트워크 내에서의 스테이블코인 유통을 통해 기술적 가능성과 리스크를 점검 중”이라며, “가상자산 시장이 법제화되고 안정화된 이후, 사용 수요에 따라 점진적으로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달러 스테이블코인 수요는 구조적…원화 스테이블코인으로 대체 어려워”
끝으로 그는 “현재 전 세계 스테이블코인의 95% 이상이 달러 기반으로, 이는 기축통화로서의 구조적 수요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도입하더라도 달러 수요를 근본적으로 줄이긴 어렵다”고 밝혔다. 그는 “환율 변동성과 자산 해외 이전 수요 등이 달러 선호의 핵심이기 때문에, 단순히 원화를 디지털화하는 것만으로는 대응에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디지털 화폐 전환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지만, 금융 안정성과 제도적 기반이 우선”이라며, “한국은행은 정책당국의 보수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기술 혁신과 안정 사이의 균형을 지켜나갈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