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자산이 국제 범죄 조직의 자금세탁 수단으로 이용되면서, 이를 둘러싼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최근 국내 수사기관이 캄보디아를 거점으로 한 사기 조직을 적발하면서, 가상자산의 익명성과 신속성이 범죄에 악용될 소지가 크다는 사실이 다시금 부각됐다.
울산경찰청에 따르면, 최근 적발된 로맨스 스캠(연애 등을 미끼로 한 금융사기) 조직은 범죄 수익을 가상자산으로 전환해 해외로 송금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피해자가 국내 조직원에게 송금한 금전을 은행 계좌를 통해 가상자산 거래소에 이체한 뒤, 이를 암호화폐로 바꾸고 수수료를 제한 후 캄보디아로 보내는 구조다. 이 조직이 한 달간 세탁한 금액만 해도 약 180억 원에 달한 것으로 확인됐다.
비슷한 사례는 이전에도 있었다. 지난 7월 대구경찰청은 약 44억 원 규모의 보이스피싱 범죄 자금을 가상자산으로 세탁해 해외로 보낸 일당을 붙잡은 바 있다. 이들은 국내 계좌 자금을 가상자산으로 전환한 후 해외 거래소로 이체하면서 당국의 감시망을 피해왔다. 이러한 사례는 단순히 국내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국제 블록체인 분석 기업 엘립틱은 보고서를 통해, 고객 신원 확인(KYC) 절차가 느슨한 일부 거래소와 가상자산 자동인출기(ATM)가 자금 세탁의 온상이 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달러와 연동된 디지털 자산인 스테이블코인, 예컨대 테더(USDT)가 자주 사용된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됐다. 실제로 국제결제은행(BIS)은 스테이블코인을 통한 범죄 활동이 2022년부터는 비트코인 등 다른 자산을 넘어섰으며, 지난해 기준 관련 범죄 중 약 63%를 차지했다고 분석했다.
가상자산의 자금 흐름 규모에 비해 당국의 감시 체계는 여전히 역부족이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박수영 의원이 국내 주요 거래소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 1월부터 9월까지 해외로 빠져나간 가상자산은 총 124조 3천억 원에 달한다. 같은 기간 국내로 유입된 자산 규모는 123조 5천억 원으로 비슷하지만, 이 가운데 일부는 세금 회피나 범죄 수익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게다가, 공식 거래소 대신 사설 환전소를 통하면 추적은 더 어려워진다. 현금으로 입금받은 자금을 고수수료를 내고 가상자산으로 환전한 뒤, 개인 지갑으로 전송하면 사실상 당국의 탐지망을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은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등을 포함한 디지털 자산 활용 논의와 맞물려 더 큰 사회적 과제를 던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혁신 산업의 성장을 위축시키지 않으면서도 범죄 악용 가능성을 막는 정교한 규제 체계 구축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향후 국내외 당국이 실명확인 정책, 불법 자금 추적 시스템, 거래소 감독 기준 강화 등을 통해 보다 체계적인 대응책을 마련할 필요성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저작권자 ⓒ TokenPost,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