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화폐 사기 넘어 국가안보 위협…‘피그버처링’ 피해액 13조 원 돌파

| 서지우 기자

‘피그버처링(pig butchering)’으로 불리는 수십억 원대 암호화폐 사기가 단순 소비자 보호 이슈를 넘어 ‘국가안보 위협’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 사기 수법은 감정 조작을 활용해 피해자와 신뢰를 쌓은 뒤 가짜 암호화폐 투자 플랫폼으로 유도하고 자금을 탈취하는 방식이다.

최근 체이널리시스(Chainalysis)의 국가안보 인텔리전스 책임자 앤드루 피어먼과 전직 검사 에린 웨스트는 팟캐스트에 출연해 이 문제의 심각성을 우려했다. 웨스트는 “돈이 오가는 모든 곳에서 이 사기의 위험이 존재한다”며, 암호화폐 사기에 대한 인식 제고와 교육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피그버처링은 주로 동남아시아에서 조직된 범죄 네트워크에 의해 운영되며, 기숙사 형태의 사기 거점에서 인신매매된 인력들이 낯선 피해자들에게 접근해 연인 관계를 위장하고 투자를 유도한다. 체이널리시스에 따르면, 2024년 이 수법으로 인한 사기 규모는 전년 대비 40% 이상 증가했고, 전체 암호화폐 사기 수익은 99억 달러(약 13조 1,220억 원)를 초과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웨스트는 “한 번 피해를 입으면 그 명단에 올라 추가 사기의 타깃이 될 가능성이 더 높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사기 피해자들은 ‘복구 전문 업체’를 자칭하는 또다른 가짜 조직으로부터 추가 피해를 입기도 한다.

피어먼은 이 사기 유형이 단순 범죄를 넘어 인신매매, 자금 세탁, 암호화폐 결제 시스템이 복합된 ‘초국가적 범죄 모델’로 성장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블록체인의 투명성이 사기자금 흐름을 추적하고 이를 차단할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블록체인을 제대로 활용하면 현금화 시점에서 사기를 차단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미국 법무부는 이러한 암호화폐 기반 사기와 맞서기 위해 2025년 11월, ‘사기센터 타격대(Scam Center Strike Force)’를 창설하고 중국과 연계된 조직 범죄를 겨냥한 단속을 시작했다. 아시아태평양(APAC) 지역 수사기관도 체이널리시스와 OKX, 테더(Tether), 바이낸스(Binance)와 협력해 4,700만 달러(약 634억 원) 상당의 사기 자산을 동결하는 등 공동 대응에 나서고 있다.

웨스트는 “초국가적 조직범죄에 맞서려면 제재, 기소, 외교적 압박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관 협력을 통한 온·오프램프 차단, 사기 조직에 대한 제재 및 처벌, 정보 공유 체계 구축이 핵심 전략으로 부상하고 있다.

피그버처링을 예방하기 위해선 몇 가지 위험 신호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온라인상에서 만나자마자 빠르게 감정을 표현하거나, 개인 정보 공개를 꺼려하며, 무위험 고수익 투자를 강조하면서 자금을 요구할 경우, 이는 대표적인 피그버처링 수법으로 의심해볼 수 있다. 특히 ‘긴급 상황’이나 ‘큰 수익 인증’ 등을 이유로 돈을 보내달라고 요구하는 경우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피그버처링은 단순한 사기 이상이다. 이는 블록체인 투명성과 국제 사회 협력을 시험하는 현실적인 국가안보 도전과제로 떠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