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차기 정부가 훌리오 벨라르데 중앙은행 총재를 다시 총재 후보로 지명하면서, 정권 교체 국면에서도 통화정책의 연속성이 유지될 가능성이 커졌다.
페루의 게이코 후지모리 대통령 당선인은 6일(현지시간) 벨라르데 총재와 면담한 뒤 그를 차기 중앙은행 총재 후보로 공식 지명했다. 후지모리 당선인이 지난달 대선 결선 투표 승자로 공식 선언된 지 사흘 만에 내놓은 인선이다. 중앙은행 총재는 한 나라의 기준금리와 물가 안정 정책을 총괄하는 자리인 만큼, 새 정부 출범 초기에 누구를 앉히느냐는 시장 신뢰와 직결된다. 이 때문에 이번 지명은 단순한 인사 발표를 넘어, 새 정부가 경제 운용에서 안정성을 우선하겠다는 신호로 읽힌다.
벨라르데 총재는 경제학자 출신으로 2006년 9월부터 페루 중앙은행을 이끌어 왔다. 20년 가까이 같은 자리를 지킨 셈인데, 대통령이 잦게 교체되고 내각도 자주 흔들렸던 페루 정치 현실을 감안하면 매우 이례적인 기록이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거쳐 간 대통령만 10명, 재무장관은 20명이 넘는다. 중남미는 역사적으로 고물가와 통화 불안에 자주 시달린 지역인데, 이런 환경에서 한 인물이 장기간 중앙은행 수장을 맡은 사례는 드물다. 미국 연방준비제도를 오래 이끌었던 앨런 그린스펀보다도 더 오랜 기간 통화정책에 관여했다는 점에서 국제적으로도 눈에 띈다.
그가 반복해 유임된 가장 큰 이유는 물가 관리 성과다. 페루는 과거 하이퍼 인플레이션(통제가 어려울 정도의 초고물가)을 겪었던 나라지만, 벨라르데 총재 재임 이후에는 비교적 안정적인 물가 흐름을 유지해 왔다. 지난해 소비자물가 상승률도 중앙은행 목표 범위인 1~3% 안쪽인 1.5%에 머물렀다. 원자재 가격 변동과 대외 금융시장 불안 같은 외부 충격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이런 성과를 냈다는 점이 높게 평가된다. 시장에서는 그가 정치적 혼란과 갑작스러운 권력 교체 속에서도 리스크를 관리하며 페루의 인플레이션율을 중남미 최저 수준으로 묶어두는 데 기여했다고 본다.
흥미로운 점은 벨라르데 총재가 그동안 여러 차례 은퇴 의사를 내비쳤다는 점이다. 그는 최근 몇 년 사이 후임군을 공개적으로 거론할 정도로 물러날 가능성을 시사해 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후지모리 당선인과 면담한 뒤 후보 지명을 받아들이며, 다른 상황이었다면 수락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번에는 기쁜 마음으로 맡겠다는 뜻을 밝혔다. 후지모리 당선인도 벨라르데의 인플레이션 관리 성과와 통화 안정 기여를 높이 평가하며, 그의 잔류가 국민과 해외 금융기관 모두에게 긍정적 신호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벨라르데 총재의 지명은 앞으로 상원 인준 절차를 거쳐야 하지만, 시장에서는 무난한 통과 가능성에 무게를 싣고 있다. 페루 중앙은행 총재 임기는 5년으로 대통령 임기와 같아 정권 출범 때마다 교체 또는 연임 여부가 관심사가 된다. 이번 인선은 새 정부가 이념적 색채보다 정책 신뢰를 앞세우려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해석이 나온다. 이 같은 흐름은 향후 페루가 정치적 불확실성 속에서도 물가 안정과 대외 신인도 방어를 경제 운영의 최우선 과제로 이어갈 가능성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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