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부채 확대와 재정 확장이 통화정책의 선택지를 좁히면서 글로벌 중앙은행의 금리 인상 부담이 커졌다는 분석이 나왔다. 재정정책이 통화정책보다 우위에 서는 ‘재정 지배’ 국면이 이어지고 있다는 진단이다.
NH투자증권은 9일 서울 여의도 파크원 타워에서 ‘2026 중앙은행 포럼’을 열고 국가와 기업의 부채 확대가 통화정책 운용 방식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했다. 포럼에서는 재정 확장과 중앙은행 독립성 사이의 긴장이 주요 변수로 제시됐다.
NH투자증권은 2026년 글로벌 국채·회사채 총발행 규모가 29조달러(약 3경8889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코로나19 당시 수준을 크게 웃도는 규모이며, 신흥국 부채 증가 속도는 선진국보다 빠를 것으로 예상됐다.
강승원 NH투자증권 수석연구원은 “글로벌 채권 공급이 두 배가 되는 데는 10년이 채 안 걸렸다”며 “국채와 크레딧이 모두 늘었고, 특히 신흥국 부채가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글로벌 채권 공급 확대가 재정과 통화정책의 관계를 바꾸는 배경이라는 설명이다.
강 연구원은 과거에는 부채를 빠르게 늘리면 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신흥국의 차입 확대를 제약했지만, 현재는 이런 부담이 약해졌다고 진단했다. 그는 “부채 발행 확대는 굉장히 중요한 변곡점”이라고 말했다.
재정정책의 성격도 2020년을 전후해 달라졌다. 코로나19 이전에는 자국의 경쟁력 있는 산업을 키우는 데 초점이 맞춰졌지만, 이후에는 공급망 조정과 국가 안보가 산업정책의 주요 요소로 부상했다.
NH투자증권 분석에서 설비투자에 대한 시장·경기 요인의 기여 비중은 2020년 이전 70.4%에서 2020년 이후 56.1%로 낮아졌다. 반면 글로벌·안보 요인의 비중은 29.6%에서 43.9%로 높아져 경기 흐름만으로 설비투자를 설명하기 어려워졌다는 분석이다.
다만 부채 규모가 커졌다는 사실만으로 통화정책의 제약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NH투자증권은 봤다. 정부와 중앙은행 가운데 어느 쪽이 먼저 정책 강도를 낮출지, 정책을 후퇴시켰을 때 더 큰 비용을 부담하는 쪽이 어디인지가 핵심이라는 설명이다.
강 연구원은 “재정과 통화 중 어느 쪽이 주도권을 갖는지는 물러섰을 때 잃는 것이 어느 쪽이 더 큰가로 결정된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은 인공지능(AI) 패권과 안보를 놓칠 수 없기 때문에 정부가 돈줄을 조일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정부가 재정을 계속 확대하면 통화정책이 그 뒤를 따라가는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 확장 재정이 상수로 자리 잡을수록 중앙은행은 물가만을 기준으로 금리를 결정하기 어려워진다는 의미다.
금리 인상은 물가를 낮추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기업 투자를 위축시키고 정부의 이자 부담을 늘릴 수 있다. 반면 금리 동결의 부작용은 물가 하락 속도가 늦어지는 정도라고 강 연구원은 설명했다.
강 연구원은 “어떤 선택이 비용을 가장 줄이는지가 중앙은행의 고민”이라며 “재정이 상수가 된 만큼 금리 인상 허들은 높아졌다”고 말했다. 재정 부담과 성장, 정책 독립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실제 글로벌 중앙은행의 정책 소통 방식도 달라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섣부른 완화정책이 정부의 재정정책에 대한 공조나 중앙은행 독립성 훼손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전병하 NH투자증권 수석연구원은 중앙은행이 과거 양적완화와 선제 안내를 통해 시장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소극적인 준칙 기반의 경제 주체로 전환될 것”이라며 “중앙은행의 정책은 모호해졌다”고 말했다. 정책 방향을 미리 제시하기보다 경제지표와 준칙에 따라 제한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재정 지배’는 정부의 재정정책이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운용에 큰 영향을 미치는 상황을 뜻한다. 재정 확대가 이어지는 환경에서는 금리 인상이 물가 안정과 기업 투자, 정부의 이자 비용에 미치는 효과를 함께 따져야 한다.
국내 시장에서도 재정과 통화정책의 충돌은 금리 경로를 판단하는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앞서 씨티가 한국은행의 추가 금리 인상 가능성과 최종금리 상방 위험을 함께 제시한 분석처럼 금리 결정은 물가뿐 아니라 성장과 금융 여건을 함께 반영하는 방향으로 논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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