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53조 베팅… ‘석유에서 게임으로’ 산업 판 바꾼다

| 김민준 기자

사우디아라비아가 비전 2030 정책에 따라 석유 중심 산업에서 탈피하려는 움직임을 강화하면서, 그 중심에 게임 산업이 놓이고 있다. 그 선봉에 선 사비 게임즈 그룹(Savvy Games Group)은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공격적인 투자로 전 세계 게이밍 생태계의 지형을 바꾸고 있다. 이들이 주도하는 변화를 이끄는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액티비전 블리자드 출신으로 올해 초 최고운영책임자(COO)로 취임한 제시 메슉(Jesse Meschuk)이다.

사비는 이미 ESL, 페이스잇(FaceIt), Vindex, VSPO 같은 이스포츠 기업부터 시작해 모바일 게임사 스코플리(Scopely)까지 단기간에 굵직한 인수 합병을 진행했다. 특히 49억 달러(약 7조 610억 원)에 스코플리를 인수한 뒤, 스코플리는 다시 '포켓몬 고'로 유명한 나이앤틱의 게임 부문을 약 35억 달러(약 5조 400억 원)에 인수하면서 사비 중심의 초대형 게임 연합 체제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메슉은 게임 시장의 지금을 '포스트 붐' 시기로 진단했다. 그는 "2011년부터 2021년까지 연평균 10% 이상 가파르게 성장했던 게임 산업이 최근 수년간 정체되고 있지만, 여전히 모바일 게이밍과 지역 다변화, 라이브 서비스 강화라는 주요 추진력이 잠재력을 남기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새로운 성장 지점을 찾기 위해 스코플리 같은 고성장 팀에 집중하고 있으며, 이들의 장기 성장곡선은 잠재력이 큰 커뮤니티에서 시작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사비의 전략은 단순한 게임 개발 수준을 넘어선다. 메슉은 “게임 산업 전반의 *에코시스템 구축*이 핵심”이라고 밝혔다. 사우디 내에서는 교육과 정책, 인프라까지 종합적으로 구축하며 외부 개발사들이 안심하고 진출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 중이다. 이를 위해 '사비 아카데미(Savvy Academy)'를 설립해 게임 개발 관련 인재를 양성하고 있으며, 외국계 업체들과의 협업으로 기술 이전과 인재 육성을 함께 추진하고 있다.

이스포츠는 또 하나의 성장 축이다. 사비가 2022년 인수한 ESL/페이스잇 그룹은 이스포츠 라이브 이벤트 사업에서 탁월한 성과를 내고 있다. 2022년 이후 누적 시청 시간은 2억 2,000만 시간에서 4억 6,000만 시간으로 *2배 이상 확대*됐다. 메슉은 “이처럼 몰입도가 높은 생중계 콘텐츠는 Z세대를 끌어들이기에 특히 유리하며, 장기적 관점에서 산업 다양성을 확보하는 데 유망한 분야다”라고 평가했다.

사우디의 공공 투자 기금(PIF)은 이미 총 370억 달러(약 53조 2,000억 원)를 게임 산업에 투자하겠다고 공표하며 전폭적인 지원에 나섰다. 궁극적인 목표는 단순한 투자성과를 넘어 *산업 자체의 현지화*에 있다. 메슉은 “캐나다가 수십 년에 걸쳐 자국 게임 산업을 성장시킨 것처럼, 사우디도 유사한 로드맵을 더 빠르게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흥미로운 점은 사비가 인수한 기업들의 독립성을 존중한다는 점이다. 메슉은 “우리는 스코플리나 EFG(ESL FaceIt Group)가 자율적으로 운영되며 고유의 문화를 유지하게 한다”며 “사비는 촉진자 역할에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세계 시장을 겨냥해 사비는 특히 중동(MENA), 동남아시아, 인도 등 고성장 지역에 주목하고 있다. 또한 메타버스, 사용자 생성 콘텐츠(UGC)와 같이 커뮤니티 중심의 플랫폼 트렌드도 중요한 기회로 보고 있다. 이는 향후 게임산업의 주도권이 어떻게 움직일지를 가늠할 수 있는 지표로 여겨진다.

모바일 게임 시장에서도 애플과 에픽게임즈 간의 분쟁 이후 앱스토어 바깥에서의 결제 자유화가 점차 확대될 조짐을 보이며 잠재 성장 기회가 있다는 점에서 사비는 스코플리의 자율성을 유지하면서도 전략적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

결국 사비는 게임을 단순한 소비 상품이 아닌, 새로운 산업 생태계의 핵심 열쇠로 보고 있다. 메슉은 “세계 최고의 게임 개발자들이 사비와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 있도록, 장기적이고 견고한 기회를 제공하겠다”고 강조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추진하는 이 거대한 구조 전환의 실험은 아직 진행형이다. 하지만 그 중심에서 사비는 단순한 투자사가 아니라, 글로벌 게임 생태계의 새로운 조력자로 자리매김하려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