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인간은 어디로 가는가… ‘인지 이주’가 시작됐다

| 김민준 기자

인류는 예로부터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이주해왔다. 빙하가 밀려오고 강이 말라붙거나 도시가 무너질 때, 사람들은 더 나은 환경을 찾아 긴 여정을 떠났다. 지금 우리는 또 하나의 이주기에 접어들고 있다. 이번엔 지형이 아닌 인식의 지형에서 벌어지는 변화다.

인공지능(AI)은 그 어떤 기술보다도 빠른 속도로 인간의 사고 영역을 재편하고 있으며, 이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최근 몇 년 사이 대형 언어모델(LLM)은 다양한 분야에서 박사급 실력을 지녔다 평가받고 있으며, 여기에서 비롯된 인식의 지진은 인간의 역할과 일의 가치까지 뒤흔들고 있다. 작문, 작곡, 계약서 작성이나 질병 진단처럼 과거 고교육자만이 수행할 수 있었던 작업을 AI가 순식간에 처리하며, 인간의 지식 여정에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프린스턴대의 과학사 교수 그레이엄 버넷은 구글의 노트북LM이 계몟주의 철학 이론과 현대 TV 광고를 연결 지어 의외의 통찰을 드러낸 사례를 언급하며, AI의 추론 능력에 경외감을 표하기도 했다. 이처럼 AI는 인간 고유의 문해력과 직관마저 위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드러냈다.

하지만 아직 인간만이 수행할 수 있는 영역은 분명 존재한다. 윤리적 판단, 공감능력, 문화적 의미의 형성 등은 여전히 기계가 감히 넘보지 못하는 영역이다. 이른바 인지 이주(cognitive migration)는 인간이 새로운 가치를 찾기 위해 이러한 영역으로 이동해가는 필연적 과정을 의미한다. 이는 직업의 미래, 교육의 목적, 문화의 방향까지 재정의하는 거대한 전환점으로 자리잡을 전망이다.

오스트리아 과학자 한스 모라벡이 1980년대 제시한 ‘모라벡의 역설’은 이러한 인지 이주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인간에게 어려운 논리 문제는 AI가 손쉽게 해결하지만, 일상적이고 직관적인 작업에서는 오히려 인간이 우수하다는 것이다. 복잡한 언어 요약은 기계도 할 수 있지만, 군중 속에서 부드럽게 사람을 피해 걷거나, 대화에 담긴 풍자를 간파하는 일은 인간 고유의 능력이라는 설명이다.

이에 따라 미래의 인간 노동은 창의력, 통찰, 감정 공명 능력, 도덕적 판단 등 기계가 아직 구현하지 못한 특성을 기반으로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영역으로 이주하는 속도와 방식은 산업 및 지역마다 상이할 수 있고, 전통적인 직업 구조는 느리게 바뀌겠지만, 그 방향성은 분명하다.

모든 직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간호사나 전기 기술자 같은 직종처럼 신체적 직관과 신뢰가 중요한 분야는 AI의 침투가 제한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일시적인 대비책일 수 있다. 전반적인 노동 가치의 변동과 사회적 기대의 변화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흐름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일부 낙관론자들은 AI가 인간에게 무한한 번영의 기회를 제공하며, 노동 없이 창의성에 몰입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 것이라 기대한다. 하지만 이러한 도달지에는 그에 상응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따른다. 기술 변화 속도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며, 기존의 교육・제도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수 있다.

AI가 줄 수 있는 심리적 충격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생존과 의미의 기반이 흔들리는 순간, 인간 정신은 예상보다 크게 흔들릴 수 있다. AI 과학자 제프리 힌턴은 최근 인터뷰에서 “우리는 지금 역사상 가장 결정적인 시점에 있다. 향후 모든 것이 급격히 변화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MIT의 경제학자 데이비드 오터는 AI를 활용해 중산층 일자리를 복원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기계가 아닌 인간의 능력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AI와의 협업을 통해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는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 설계, 교육 개혁, 정책적 투자가 동반돼야 한다.

인지 이주는 세대를 걸쳐 일어나는 변화다. 단순히 기술을 익히는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의미를 재정립하는 여정이다. 누군가는 부인과 분노, 체념을 거쳐 마침내 수용에 이르는 슬픔의 다섯 단계를 거쳐야 할 수도 있다. 또는 끝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할 수도 있다.

결국 AI 시대의 진짜 화두는 기술 자체보다, 변화 속에서 인간다움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있다. 이 거대한 전환기를 어떻게 지날지는, 오늘날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