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스테이블코인 vs 예금토큰…‘신뢰의 구조’가 다르다

| 토큰포스트

디지털 머니의 시대가 본격화되고 있다. 최근 JP모건, 씨티, 뱅크오브아메리카 등 미국 대형 은행들이 ‘예금토큰(Deposit Token)’ 도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들은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예금을 토큰화함으로써 디지털 금융 인프라를 구축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시장의 반응은 차갑다. 표면적으로는 기술 혁신이지만, 본질은 ‘신뢰의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반감이다.

스테이블코인은 자산 기반이다. 테더(USDT)는 보유 자산의 80~90%를 미국 국채로 구성하고 있으며, 서클의 USDC 또한 현금, 단기 국채, 머니마켓펀드 등을 담보로 삼고 있다. 사용자 입장에서 스테이블코인은 은행의 지급 약속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실물 자산’ 자체를 디지털로 보유하는 것이다. 구조상 스테이블코인은 디지털화된 무위험 자산, 즉 ‘토큰화된 달러 국채’에 가깝다.

예금토큰은 이와 다르다. 은행의 대차대조표에 기재된 예금을 토큰으로 전환한 것으로, 구조적으로는 은행의 부채를 디지털화한 것에 불과하다. 이는 곧 사용자에게 은행의 지급능력, 신용, 리스크 관리에 대한 신뢰를 요구한다. 은행이 보유한 상업대출, 부동산 자산, 파생상품 등은 언제든지 유동성과 가치의 불안 요소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한 기술적 사양이 아니라, 신뢰의 구조 자체에 대한 선택을 의미한다. 사용자는 "누가 발행했는가"보다 "무엇으로 담보되어 있는가"를 따진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시장 참여자들이 은행의 신용보다, 실물 자산 기반의 토큰을 선택하고 있다.

국내 상황을 보자. 한국 역시 ‘토큰 증권(STO)’과 함께 예금 기반 디지털 자산에 대한 실험이 이어지고 있다. 주요 시중은행들은 자체 블록체인을 활용한 내부 결제망, 유동성 정산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으며,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다양한 테스트가 진행 중이다. 그러나 대다수 프로젝트는 폐쇄망에 국한되어 있고, 일반 사용자는 접근조차 어렵다.

이와 대조적으로, 글로벌 스테이블코인은 이미 국내 투자자들 사이에서 일상화되고 있다. 해외 거래소를 이용하거나 P2P 플랫폼을 통해 테더(USDT)를 송금·보관하는 일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국내 규제가 이를 명시적으로 금지하거나 인정하지 않고 있음에도, 시장은 ‘원화에 준하는 기능을 하는 대체 자산’을 자발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흐름은 곧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부재가 초래한 구조적 리스크를 반증한다. 지금까지 한국은 원화를 담보로 하는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이는 자금세탁이나 환투기 등의 우려 때문이지만, 한편으로는 국민이 합법적이고 투명한 방식으로 디지털 원화를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국내 금융당국은 ‘은행권 중심 예금토큰 모델’을 선호하는 듯하다. 안정성과 제도 내 통제를 강조하며, 원화 스테이블코인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냉정히 말해, 예금토큰은 금융기관 간 유동성 정산에는 적합할지 모르나, 국민이 활용할 수 있는 디지털 원화 시스템으로는 역부족이다. 그것은 사용자 중심의 자산이 아니라, 은행 내부 시스템을 위한 디지털 도구에 가깝다.

최근 미국 의회를 통과한 ‘GENIUS 법안’은 비은행권이 발행한 스테이블코인을 제도권 내로 편입시키며, 규제 준수형 스테이블코인의 길을 열어주었다. 테더는 이미 작년 미국 국채 보유량 기준 세계 국가 순위 5위에 올랐으며, 글로벌 달러 유통 구조에서 무시할 수 없는 행위자가 되었다. 이러한 글로벌 구조적 변화에 한국이 계속 뒤처질 수는 없다.

결국 이 싸움은 기술이 아니라 신뢰의 문제다. 그리고 신뢰는 ‘누가 발행했는가’보다 ‘무엇으로 담보되는가’에서 나온다. 한국도 더 이상 원화 스테이블코인 논의를 미뤄선 안 된다. 제도권 내에서 투명하고 검증 가능한 구조로 발행되는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국내외 투자자 보호뿐 아니라 디지털 경제 시대의 통화 주권 유지 차원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자산이다.

예금토큰이 은행의 유동성을 높이고 내부결제를 효율화하는 수단이라면, 스테이블코인은 사용자 중심의 새로운 글로벌 화폐다. 한국이 이 구조적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고 머뭇거린다면, 디지털 시대의 신뢰는 더 이상 ‘원화’에 머물지 않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