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원화 스테이블코인, 전략 없이 뛰면 ‘돈만 태운다’

| 토큰포스트

스테이블코인은 블록체인 경제의 관문(關門)이자 기반망이다. 2024년 한 해 결제 규모가 24조 달러를 넘겼고, 2025년 1분기 기준 시가총액의 압도적 다수가 달러 연동 자산이다.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전체 법정통화 연동 물량의 99% 이상을 차지한다는 점은, 이 시장이 이미 달러 유동성의 중력권 안에 들어와 있음을 말해준다. 미국은 이를 외환·금융 패권 유지의 도구로 삼겠다는 뜻을 숨기지 않는다.

유럽은 미카(MiCA)로 뒤늦게 추격 중이다. 사용 비중은 빠르게 늘었지만 공급 측면에서는 다르다. 유로 표시 물량은 여전히 미미하고, 알고리듬형 토큰을 사실상 금지한 채 1:1 준비금을 의무화하면서 수익성은 얇아졌다. 규정에 맞추지 못한 유로 스테이블코인은 잇따라 상장폐지됐고, 발행사들도 우회 전략을 찾는 형국이다. 규제 준수·유동성·수익 구조, 이 세 박자를 못 맞추면 시장에서 퇴출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유럽이 보여준다.

시장 현실은 더 냉정하다. 스테이블코인 유통의 대부분은 소매 결제가 아니라 전문 트레이더의 유동성 라우팅, 거래소 재정거래, 금고 리밸런싱에 쓰인다. 거래의 기준축은 USDT·USDC다. 누구도 쪼개진 다수의 풀에서 비달러 페어를 위해 재균형 비용을 떠안고 싶어하지 않는다. 동일통화 1:1 준비금을 요구하면 운용수익률은 1% 안팎으로 내려앉는다. 연간 1천만 달러 운영비를 감당하려면 최소 10억 달러 이상의 예치금을 모아야 겨우 손익분기점이다. 여기에 은행·결제사·거래소 같은 ‘앵커’가 수천억 원대 장기 예치로 초기 유통을 떠받쳐 주지 않으면, 토큰은 발행과 동시에 시장에서 증발한다. 비달러 스테이블코인이 전체의 0.2%도 못 미치는 이유다.

한국 정부는 2025년 말까지 규제된 스팟 ETF와 함께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보관·가격산정·운용·투자자보호 체계를 갖추고, 거래수수료 인하, 중앙은행 관할 아래 은행·핀테크의 발행 참여 같은 큰 틀도 제시했다. 해외 스테이블코인 의존을 낮추고 자금을 국내에 머물게 하겠다는 목표도 분명하다. 방향은 옳다. 그러나 “있으면 쓰이겠지”라는 낙관만으로는 실패한다.

관건은 전략이다. 첫째, 국내 거래소와 은행이 함께 만드는 두터운 유동성 풀이 필요하다. 투자자가 BTC/USDT 대신 BTC/원화 스테이블코인 페어로 불편 없이 거래할 수 있을 만큼의 깊이를 만들어야 달러 중력에서 벗어난다. 둘째, 최소 1% 이상의 순수익률을 보장할 운용 프레임이 있어야 한다. 지급준비·예치 운용 규제를 합리화해 단기국채·역레포 등 저위험 운용으로도 비용을 감당할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셋째, 초기 앵커 유통망이 필수다. 대형 은행·결제회사·빅테크가 초기부터 거액을 예치하고, 국내외 주요 거래소 상장과 결제 네트워크 연계를 동시에 밀어줘야 한다. 이 셋 중 하나만 빠져도 실패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다. 이 쟁점들은 9월 10일 서울에서 본지가 여는 ‘온체인 심포지엄 2025’에서도 산업·학계·규제 당국과 폭넓게 토론할 것이다.

정부도 “결제 편의·자본유출 억제” 같은 장밋빛 기대만 내세울 때가 아니다. 달러 패권을 공고히 하려는 미국의 전략, 수익성과 규제의 긴장 속에서 허덕이는 유럽의 현실을 냉정하게 읽어야 한다. 발행 주체, 준비금 운용, 상장·결제 생태계, 예치 인센티브를 하나의 패키지로 묶은 ‘실행 로드맵’이 나와야 한다. 법만 만들고 시장에 맡겨서는 안 된다.

스테이블코인은 만능 키가 아니다. 잘 설계하면 국내 금융 인프라를 업그레이드하는 촉매가 될 수 있지만, 준비 없이 뛰어들면 투자금과 신뢰를 동시에 잃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빨리”가 아니라 “바로”다. 방향과 설계가 먼저다. 그 다음이 속도다.

ℹ️ 참고: 글로벌 리서치 기관 메사리(Messari)가 지난 7월 스테이블코인 산업의 구조적 변화와 미래 방향성을 집중 분석한 연례 보고서 《2025 세계 스테이블코인 시장 보고서(State of Stablecoins)》를 발간했다. 해당 보고서는 본지를 통해 공식 한글 번역본으로 독점 배포 중이며, 전문은 구글폼 신청서를 통해 받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