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SEC가 마침내 스스로의 오류를 인정했다. 10년 동안 시장을 얼어붙게 만든 집행 중심 규제를 뒤로하고, 암호화폐 시장의 틀 자체를 다시 짜겠다는 선언이 나온 것이다. 폴 앳킨스 SEC 위원장이 12일 내놓은 발언은 단순한 정책 제안이 아니라 미국 규제 철학의 대전환을 의미한다. 더 큰 문제는 이 변화가 미국 내부의 방향 전환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계가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한국은 여전히 출발선에서 한 발도 내딛지 못한 채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Project Crypto는 ‘미국은 뒤처지고 있다’는 자각에서 시작됐다
올해 7월 31일, 앳킨스 위원장은 미국이 더 이상 금융 혁신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는 “우리는 관망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끈다. 우리는 구축한다”는 선언과 함께 SEC가 시장 구조를 다시 설계하겠다고 밝혔다.
Project Crypto의 출발점에는 미국 기업과 개발자, 자본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냉혹한 현실 인식이 있었다. SEC는 지난 수년간 자신들이 촉발한 규제 혼란이 미국의 경쟁력을 약화시켰다는 점을 인정했다. 반면 한국에서는 이런 자기 성찰이나 책임 인정의 기미를 찾아보기 어렵다.
SEC가 토큰을 네 가지로 나눴다는 사실 자체가 ‘역사적 변화’다
SEC는 암호화폐를 네 가지로 구분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디지털 상품, 디지털 컬렉터블, 디지털 도구는 비증권으로 분류되며, 오직 토큰화 증권만이 증권으로 남는다. 이 방식은 기존 SEC의 접근과 극명하게 대비되며, 뒤늦게 회복된 상식에 가깝다.
그러나 한국 규제는 여전히 암호화폐를 단일한 위험 대상으로 다룬다. 기능과 실질보다 ‘위험 가능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규제의 기준이 산업 이해보다 공포와 면책에 치우쳐 있다. 이러한 태도는 결과적으로 산업 경쟁력의 기초 자체를 무너뜨리고 있다.
“투자계약은 종료된다”는 선언의 무게를 한국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SEC는 이번 연설에서 “투자계약은 계약이 끝나면 종료되며, 블록체인에 남아 있다고 해서 토큰이 영원히 증권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 발언은 미국 시장을 10년 동안 옥죄어 온 ‘영구적 증권성’이라는 족쇄를 해체하는 선언이다.
토큰은 초기 단계에서 투자계약 형태로 판매되었더라도, 프로젝트가 약속을 이행하면 독립적 네트워크 자산으로 존재할 수 있다. 토큰의 ‘기원(origin)’이 법적 굴레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 명확해진 것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여전히 초기 판매 방식이 영구적인 규제 근거로 사용되고 있다. 기술 생태계의 진화를 고려하지 않는 접근이며, 초기 단계의 형태를 평생의 규제 기준으로 고정시키는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 혁신과 위험 사이의 균형을 고려하는 시도조차 부족하다.
미국은 감독권을 나누고 있다. 한국은 감독권을 떠넘기고 있다
SEC는 암호화폐의 성질이 달라지면 CFTC 등 다른 감독기관이 관할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는 미국이 기능 기반 감독 구조로 이동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SEC, CFTC, 은행 규제기관 등이 역할을 나누는 다중자산 구조가 논의 단계에 들어갔으며, 자산 성격 변화에 따라 감독권이 이동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재설계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금융위, 금감원, FIU, 검찰, 국세청, 과기부 등 수많은 기관이 모두 관여하지만 정작 책임 소재는 명확하지 않다. 감독의 사각지대는 넓고, 정책은 조정보다 충돌에 가까운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는 산업이 성숙하기 어렵다.
SEC의 입법 요구는 미국이 ‘장기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신호다
앳킨스 위원장은 의회에 디지털 자산 관련 입법을 촉구했다. 이번 변화가 일시적 조정이 아니라, 정책의 지속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움직임이라는 의미다. SEC는 정책 방향이 차기 지도부에서 뒤집히지 않도록 제도화하려 하고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입법이 산업 전략의 일환이라기보다 규제 강화의 수단으로만 다뤄지는 경우가 많다. 정작 필요한 것은 장기 전략에 기반한 입법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결론은 명확하다: 미국은 움직였고, 한국은 머물러 있다
SEC의 이번 행보는 글로벌 규제 패러다임을 다시 쓰는 흐름이다. 투자계약 종료 원칙은 국제적 규제 기준을 움직일 가능성이 크며, 기능·실질 중심 규제는 향후 글로벌 표준이 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이 방향을 확정한 이상, 한국은 더 이상 관망할 시간이 없다.
한국은 여전히 “조치 검토 중”, “TF 구성 예정”, “고려해 보겠다”는 말로 시간을 낭비하며 정책 변화를 지연시키고 있다. 산업은 성장하고 있지만, 규제는 멈춰 있고, 혁신은 위험을 이유로 차단되며, 산업은 점점 해외로 도망가고 있다. 한국의 정책 속도는 글로벌 흐름보다 최소 5년 뒤처져 있다.
한국이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회의가 아니라 ‘방향 설정’이다
미국은 잘못을 인정했고 방향을 바꿨으며, 그 변화를 제도화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한국은 여전히 뒤를 돌아보고 있다. 규제의 시대는 끝나지 않겠지만, 규제의 방식은 완전히 바뀌고 있다. 미국은 이미 변화에 들어갔고, 한국은 변화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이 간극은 앞으로 10년간 한국의 산업 지도, 기업 경쟁력, 인재 이동, 자본 유입의 방향을 결정할 것이다. 미국은 결정을 내렸고, 시장도 이에 반응하고 있다. 이제 한국이 답할 차례다.
<저작권자 ⓒ TokenPost,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