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큰포스트 칼럼] 스테이블코인, 금융의 작동 방식을 다시 쓰다

| 하이레 기자

스테이블코인은 더 이상 주변부 기술이 아니다. 디지털 자산을 넘어 새로운 금융 인프라를 만들어가고 있다. 기존 시스템이 오랫동안 풀지 못했던 문제를 해결하고 금융의 사용자 경험(UX)을 다시 설계한 결과다. 이러한 변화의 밑바탕에는 눈에 드러나지 않는 금융의 심층 구조, 금융이 실제로 작동하는 운영체제(OS)의 조용한 전환이 놓여 있다.

스테이블코인, 달러의 새로운 UX 레이어

스테이블코인은 달러 같은 안전자산에 1대1로 연동된 블록체인 기반 디지털 자산이다. 약 10년 전 암호화폐 생태계의 진입점이자 내부 결제 수단에서 출발해 점차 실물 경제의 불편함을 해소하는 디지털 달러 인프라로 확장됐다.

특히 물가상승과 통화가치 하락 문제를 겪는 신흥시장에서 가치 저장·일상 결제·국경 간 송금에 활용되는 대안 통화로 자리 잡았다. 이런 흐름은 작지 않다. 모건스탠리에 따르면 2024년 터키의 국경 간 스테이블코인 결제 규모는 630억 달러에 달했고 인도·나이지리아·인도네시아 등에서도 확산 속도가 가파르다.

이들이 선택한 것은 특정 토큰이 아니라 불안정한 자국 금융 시스템과 자본 통제를 우회할 수 있는 저마찰·저비용의 ‘달러 UX’다. 스테이블코인은 더 나은 사용자경험을 가진 '달러'로 기능하며 실제 경제 활동 속에 깊이 자리 잡았다. 암호화폐 내부 수요를 넘어 기존 금융의 비효율을 대체하는 구조적 수요가 생겼다는 의미다.

캐나다 결제기업 누비(Nuvei)의 브라이스 저스는 “스테이블코인은 결제 시장에서 명확한 제품-시장 적합성을 입증했다”며 “유행이 아니라 기존 결제 시스템을 명확히 능가하는 지점을 찾아냈다”고 평가했다.

글로벌 기업 거래에서도 마찬가지다. 스테이블코인은 마감·시차 없는 24시간 실시간 결제, 즉시 정산(T+0), 중개 단계 축소, 저렴한 수수료, 낮은 실패율 등 기존 금융보다 훨씬 매끄러운 사용자경험을 제공한다. T+1~T+5 정산 환경에서 발생하는 제약과 위험, 비용을 감수해야 하는 주식·채권·외환·송금·카드결제 등 전통 금융 방식을 점차 대체하고 있다.

이러한 효율성은 자금 흐름의 연속성도 크게 높였다. 마찰이 줄고 후속 작업이 가벼워지면서 결제·거래뿐 아니라 투자·무역금융·신용대출까지 흐름이 자연스럽게 확장되고 있다. 비자는 최근 보고서에서 스테이블코인이 단순 결제를 넘어 국경 간 신용대출·무역금융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위험과 비용이 낮아지면서 금융 전반의 자금 회전 속도는 빨라지고, 기업이 활용할 수 있는 기회의 폭도 점차 넓어지고 있다.

이처럼 활용 범위와 깊이를 확장하며 스테이블코인은 실물 경제의 자본이 흐르는 금융 인프라로서의 역할을 더욱 키워가고 있다. 단순한 효율 개선을 넘어 금융의 자동화와 신용 창출 방식 자체를 다시 설계하는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스테이블코인, 금융 ‘작동 방식’의 전환

스테이블코인의 확산은 사용자경험의 개선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금융의 심층 구조, 즉 운영체제 자체를 바꾸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글로벌 결제·신용·자본 이동을 기존 금융망에서 인터넷 네이티브 운영체제로 옮기고 있다.

기존의 금융이 신뢰를 바탕으로 은행·청산기관·카드사 같은 중개 기관을 통해 작동했다면 스테이블코인은 이 과정을 코드 기반의 자동화 시스템으로 옮긴다. 서류와 절차 중심이던 금융이 코드와 데이터로 움직이는 체계로 바뀌는 것이다. 결국 달러 자체가 ‘명령어’를 담고 자동으로 실행되는 완전히 새로운 금융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달러에 '프로그래밍 가능성'을 더한다. 유동성 관리, 규제 이행, 계약 실행, 정산 등 분리되어 있는 금융 기능을 스테이블코인이라는 하나의 ‘레일’ 위에서 통합적으로 작동하게 한다. 신용·담보 같은 복잡한 금융 서비스도 자동으로 구현할 수 있는 새로운 금융 인프라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핀테크 전문 매체 PYMNTS는 스테이블코인을 “금융 버전의 HTTP”라고 표현했다. 2000년대 HTTP가 파편화된 웹을 통합하고 인터넷을 상호운용 가능한 공간으로 만든 것처럼 스테이블코인은 비자·SWIFT·ACH 같은 서로 다른 결제망을 블록체인 기반 중립 인프라 위에서 하나의 표준으로 재편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또 스테이블코인이 인프라로 성장할수록 사용자에게는 점차 보이지 않는 기술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인터넷 사용자가 HTTP를, 이메일 사용자가 SMTP를 인식하지 않는 것처럼 스테이블코인은 결국 상호운용성과 안정성, 비용 절감을 조용히 뒷받침하는 보이지 않는 금융 표준으로 작동할 것이라고 봤다.

금융 권력의 재편, 온체인 화폐 경쟁의 시작

은행과 핀테크 기업들은 이러한 금융 인프라의 변화를 인식하며 ‘관리자’로서의 역할을 어떻게 지켜갈지 모색하고 있다. 온체인 금융의 잠재력이 분명해지면서 이들을 지탱해 온 신뢰 기반 금융 시스템과 비용 구조의 타당성이 점차 약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스탠다드차타드 CEO 빌 윈터스는 “금융 시스템의 재배선(rewiring)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그는 “거의 모든 거래가 블록체인 위에서 이뤄질 미래가 온다”며 “이러한 변화가 실제 어떤 형태로 구현될지를 실험을 통해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JP모건과 HSBC는 스테이블코인과 유사한 자체 토큰화 예금을 이미 공개했고 알리바바는 이를 활용한 국경 간 결제 개선을 추진 중이다. 모건스탠리·소파이·인터랙티브 브로커스 등도 온체인 금융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들이 바라는 건 ‘탈중개화’가 아니라 은행의 역할 변화다. 회계컨설팅사 그랜트손튼의 마커스 피스 산업 부문 총괄은 은행의 역할이 수탁에서 ‘서비스형 현금(Cash-as-a-Service)’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온체인 달러는 스마트 컨트랙트를 통해 직접 규칙을 담을 수 있어 기존 업무를 더 빠르고 저렴하게 정확하게 수행하게 해줄 것”이며 “은행은 단순 수탁기관에서 프로그래밍 가능한 화폐 인프라의 제공자로 변모할 것”이라고 말했다.

결제 대기업들은 더 발빠르게 현실적인 대응을 시작했다. 비자·마스터카드·페이팔·스트라이프 등은 자사 네트워크에 스테이블코인을 통합하고 있고 스테이블코인 시장을 양분하는 테더와 서클도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발행 단계를 넘어 온체인 결제·정산 인프라 구축으로 범위를 확장하고 있다.

규제와 패권, 스테이블코인의 미래를 규정하다

스테이블코인의 성장은 규제적으로도 구조적으로도 이미 예견된 흐름이다. 유럽·홍콩·일본에 이어 미국까지 지니어스 법으로 규제 틀을 완성하면서 스테이블코인의 제도권 금융 편입과 금융권의 채택 흐름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미국이 스테이블코인 규제를 확립하고 지원하는 이유는 스테이블코인을 달러 패권을 강화하고 연장할 전략적 도구로 보기 때문이다. 신흥시장의 적극적인 디지털 달러 채택은 탈달러화 흐름을 둔화시키고 있다. JP모건은 향후 2년간 스테이블코인이 1조4000억 달러 규모의 신규 달러 수요를 만들 것으로 전망했다. 또 미국 국채가 스테이블코인의 준비금의 주요 구성 자산이기 때문에 스테이블코인의 성장은 곧 미국 국채 수요의 확대이자 국가 재정과 금리 안정에 기여할 수 있다.

이에 과거 고위험 가중치로 스테이블코인의 성장을 억제하려 했던 규제 시도는 국가와 은행권 모두에서 현실성이 없다는 판단을 받으며 힘을 잃고 있다. 이러한 규제를 주도했던 바젤위원회도 최근 스테이블코인의 확산을 기존 규제로 수용하기 어렵다며 새로운 틀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미국 기업 중심의 결제망에 이어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금융 전반에 침투하면서 다른 나라들 역시 결제 주권과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한 대응에 나서고 있다. 아직 중앙은행들은 스테이블코인을 ‘보조적 수단’으로 규정하고 중앙은행 중심의 대안을 제시하지만 발빠르게 확산되는 스테이블코인과 달리 그 파급력과 실효성 면에서 아직 확정된 것이 없다.

새로운 금융 OS가 여는 기회와 가능성

스테이블코인 시장은 3000억 달러를 넘었다. 아직 미국 은행 예금의 1.6% 수준이지만 5년 안에 2~3조 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그러나 스테이블코인의 논점은 단순히 성장 규모가 아니라 금융 UX와 OS의 재설계에 있다. 파편화된 금융망이 통합되고 금융의 기본 단위인 화폐가 프로그래밍 가능한 구조로 바뀐다. 기존 금융 인프라를 단순히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금융이 움직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다시 쓰고 있다.

새로운 레일이 자리 잡으면 시장의 흐름은 훨씬 더 촘촘해진다. 마찰이 줄어들면 작은 자금도 제약 없이 움직이고 금융의 ‘혈류’는 이전보다 더 멀리 더 낮은 곳까지 도달할 수 있다. 그동안 유동성이 닿지 못했던 영역에까지 흐름이 스며들며 금융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가치의 범위 역시 확장할 수 있다. 기술 변화는 금융의 표준을 바꾸기 시작했다. 기본값으로 자리 잡아가는 새 UX와 OS를 어떻게 창조적으로 활용해 어떤 금융 지형을 만들어갈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