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통화기금(IMF)이 특정 틈새 투기 자산에 대해 56페이지 분량의 심층 보고서를 내는 일은 결코 흔치 않다. 이번에 발표된 IMF의 "스테이블코인의 이해(Understanding Stablecoins)" 보고서는 글로벌 경제 서사가 확실하게 변화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 보고서가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우리는 더 이상 스테이블코인을 단순히 ‘암호화폐 시장의 부산물’로 취급해서는 안 되며, 전 세계 거시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평행 통화 레일(Parallel Monetary Rail)’이 형성되는 과정을 목격하고 있다는 것이다. 향후 수년간 정책 논의의 지형을 바꿀 핵심 인사이트를 정리했다.
■ 국경 간 결제의 새로운 표준: 비트코인을 넘어선 스테이블코인
오랫동안 비트코인이 국경 없는 가치 이전 수단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지만, IMF 데이터는 시장이 다른 승자를 선택했음을 증명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스테이블코인의 국경 간 자금 흐름은 이미 2022년 초에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같은 비담보 암호화폐를 넘어섰으며, 그 격차는 계속 벌어지고 있다.
2024년 기준, USDT와 USDC의 국경 간 흐름은 약 1조 5천억 달러에 달해 기존 암호화폐의 온체인 흐름을 압도했다. 아프리카, 중동, 라틴아메리카와 같은 지역에서는 이미 GDP 대비 스테이블코인 사용량이 상당히 높은 수준이며, 이는 단순한 투기가 아닌 가치 저장과 송금을 위한 실질적인 효용성을 증명하고 있다.
■ 달러 패권의 증폭제: 97%의 압도적 점유율
보고서는 스테이블코인 발행량의 약 97%가 미국 달러(USD)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단순한 암호화폐 시장의 관행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달러 수요에 기인한다.
전 세계 무역, 외환 보유고, 결제에서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은 이미 미국의 GDP 비중을 훨씬 상회한다. 스테이블코인은 달러 접근 비용을 낮춤으로써 이러한 불균형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인플레이션과 싸우는 신흥국 입장에서 이것은 단순한 ‘크립토 채택’이 아니라 사실상의 ‘디지털 달러화(Digital Dollarization)’ 현상이며, 이는 해당 국가의 통화 주권을 위협하는 통화 대체(Currency Substitution) 리스크를 야기한다.
■ 거시경제를 움직이는 힘: 2030년까지 3.7조 달러 전망
IMF는 민간 부문의 예측을 종합하여 2030년 스테이블코인 시장 규모를 전망했다. 보수적 시나리오는 5,000억 달러, 기본 시나리오는 약 1조 5,000억 달러, 최대 시나리오는 3조 7,000억 달러에 달한다.
최대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경우, 스테이블코인은 틈새시장을 넘어 거시경제의 주요 변수가 된다. 이러한 성장은 국경 간 결제를 넘어, 토큰화된 금융 자산의 결제 수단, 그리고 금융 시스템이 비효율적인 국가에서의 소매 결제 수단으로 확장되는 것에 기인한다.
■ 시스템 리스크의 부상: 미 국채 시장의 고래
스테이블코인 규모가 커지면서 이들이 보유한 자산이 국채 시장에 미치는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현재 스테이블코인은 발행된 미국 단기 국채(T-bills)의 약 2%를 보유하고 있다.
아직은 적어 보일 수 있지만, IMF는 향후 급격한 성장이 국채 수익률을 압박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는 ‘크립토’와 ‘전통 금융’ 사이에 새로운 피드백 루프가 형성됨을 의미한다. 보고서는 이로 인한 은행 예금 이탈(Disintermediation), 뱅크런 발생 시 담보 자산의 투매(Fire sale)로 인한 시장 기능 마비 등 구체적인 거시적 위험을 명시했다.
■ 가장 큰 위협은 '규제 파편화'
보고서에서 가장 시급하게 지적한 문제는 글로벌 공조의 부재다. 현재 주요국들의 규제는 제각각이다.
IMF는 이러한 규제 파편화가 발행사들이 규제가 약한 곳을 찾아다니는 ‘규제 차익(Regulatory Arbitrage)’ 기회를 제공하며, 국경 간 감독의 사각지대를 만든다고 경고한다.
■ 크립토 렌즈에서 거시경제 렌즈로
IMF 보고서의 핵심 메시지는 분명하다. 스테이블코인을 기술이나 투기적 관점의 ‘크립토 렌즈’로만 바라보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다.
이제 정책 입안자들은 스테이블코인을 ‘거시경제적 렌즈’로 바라보고 있다. 이는 사실상 그림자 달러(Shadow Dollar) 인프라이자 미국 부채의 새로운 수요처이며, 동시에 전통 은행을 위협하는 잠재적 경쟁자다. 시장 규모가 수천조 원 대로 향해가는 지금, 스테이블코인은 무시하기엔 너무 거대하고 규제 없이 방치하기엔 너무나 시스템적인 존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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