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미국은 '1,000조 원' 빗장을 열었는데... 한국은 아직도 '입법 대기실'인가

| 토큰포스트

2025년 12월 11일, 미국 자본시장의 역사적인 이정표가 세워졌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미국 중앙예탁결제원(DTCC)에 '비조치 의견서(No-Action Letter)'를 발급한 것이다. 이로써 연간 수경 원(3.7 quadrillion dollars) 규모의 증권 거래를 처리하는 DTCC가 공식적으로 토큰화된 주식과 실물 자산(RWA)을 수탁하고 온체인 상에서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소식이 갖는 무게감은 단순히 "블록체인을 도입했다"는 수준을 넘어선다. 이것은 그동안 토큰 증권 시장의 고질적인 병폐였던 '유동성 파편화'와 '발행사 리스크'를 일거에 해소하는 결정타이기 때문이다.

'골드 스탠다드'의 등장: 나이키 운동화와 엔비디아 주식의 차이

지금까지의 토큰화 시장은 '섬(Island)'과 같았다. A 플랫폼에서 발행한 엔비디아(NVIDIA) 토큰은 B 플랫폼의 토큰과 법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달랐다. 서로 호환되지 않으니 유동성은 쪼개지고, 투자자는 발행 플랫폼의 신용도까지 걱정해야 했다.

하지만 DTCC가 나서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DTCC가 수탁하고 발행하는 토큰화 주식은 '기관급 골드 스탠다드(Institutional Gold Standard)'가 된다. 어떤 플랫폼에서 거래되든 그 뒤에는 미국 금융 인프라의 중추인 DTCC가 버티고 있다. 이는 곧 '발행자 불문 호환성(Issuer-agnostic fungibility)'을 의미하며, 전 세계 기관 자금이 안심하고 들어올 수 있는 고속도로가 깔렸음을 뜻한다. 프랭크 라 살라(Frank La Salla) DTCC CEO가 언급한 "담보의 이동성, 24시간 거래, 프로그래밍 가능한 자산"이 비로소 현실이 된 것이다.

한국: 기술은 준비됐으나, 법은 잠자고 있다

그렇다면 'IT 강국'을 자처하는 한국의 상황은 어떠한가? 안타깝게도 우리는 여전히 '입법 대기실'에 갇혀 있다.

한국예탁결제원(KSD)은 이미 2025년 6월 '토큰증권(STO) 테스트베드'를 오픈하며 기술적 준비를 마쳤다. 우리 기업들의 블록체인 기술력은 세계적 수준이며, 인프라 구축도 완료 단계다. 그러나 정작 이 도로 위를 달릴 자동차(법안)가 없다.

미국 SEC가 '비조치 의견서'라는 유연한 행정 도구를 통해 기존 인프라(DTCC)에 즉각적인 권한을 부여하고 시장을 열어젖히는 동안, 한국의 토큰증권 법제화(자본시장법 및 전자증권법 개정안)는 21대 국회에서 폐기된 후 22대 국회에서도 "우선순위에서 밀려" 표류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고사(枯死) 직전"이라고 표현한다.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법적 불확실성이 해소되지 않으면 글로벌 자본은 한국 시장을 패싱(Passing)할 수밖에 없다.

규제의 속도가 금융 주권을 결정한다

미국의 이번 조치는 "기존 금융 시스템 위에 디지털의 옷을 입히겠다"는 선언이다. 러셀 1000 지수에 포함된 우량 주식들이 토큰화되어 24시간 전 세계를 누빌 때, 한국의 투자자들은 여전히 낡은 시스템 속에 갇혀 있을지도 모른다.

DTCC의 사례는 규제 당국의 태도가 시장의 성패를 가른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법안을 만들기 위한 지루한 공방이 아니라, 미국처럼 과감한 샌드박스 적용과 행정적 유연함이다. 1,000조 원의 머니무브가 시작된 지금,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