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말 은(銀) 가격은 온스당 80달러를 돌파하며 시가총액 기준으로 엔비디아와 전 세계 암호화폐 시장을 잠시 넘어섰다. 하루 만에 6% 이상 급등했고 연초 대비 상승률은 약 170%에 달했다. 이후 빠른 조정이 뒤따랐지만, 이 짧은 급등 국면은 장기간 불확실성과 변동성에 노출된 시장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은이 만든 '역전극', 엔비디아·비트코인을 넘다
투자 시장에서 은은 금에 비해 '보조적인 귀금속'으로 인식돼 왔다. 안전자산 선호 국면에서도 중앙은행과 기관 자금은 주로 금에 집중됐다. 산업 수요 비중과 높은 변동성 탓에 은이 장기 포트폴리오의 핵심 자산으로 채택되는 경우는 제한적이었다.
이번 급등 국면에서 은의 시가총액은 약 4조6800억 달러까지 확대됐다. 엔비디아를 상회했고 전 세계 암호화폐 시장 전체 시가총액도 넘어섰다. 이후 가격 조정과 함께 은 시가총액은 4조1810억 달러로 내려왔지만 여전히 글로벌 자산 순위 3위를 유지하고 있다. 올해 5위권에 들었던 비트코인은 시가총액이 1조7430억 달러로 급감하며, 과거 은이 자리했던 글로벌 자산 순위 8위까지 밀렸다.
은, 왜 이렇게까지 올랐나...수요와 공급, 확실성
은 가격 급등의 배경 중 하나는 구조적인 공급 부족이다. 단기적인 생산 차질이 아니라 오랜 기간 이어진 광산 투자 감소와 환경 규제 강화, 지정학적 리스크가 누적된 결과다. 투자 리서치 계정 'Bull Theory'에 따르면 은은 5년 연속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는 '구조적인 공급 부족' 상태에 놓여 있고 단기간에 해결할 방법이 없는 상태다.
이처럼 공급이 급격히 감소하는 가운데 수요는 급증하고 있다. 수요 측면에서 은은 더 이상 귀금속이 아니다. 산업 수요가 전체 은 수요의 50~60%를 차지한다. 태양광 패널, 전기차, 전자기기, 의료 기기, 반도체, 배터리 등 에너지 전환과 첨단 산업의 핵심 소재로 소비되고 있다. 실제로 태양광 패널용 은 수요는 전년 대비 60% 이상 증가했다. 친환경 전환과 에너지 인프라 재편이라는 장기 흐름 속에서 은은 대체하기 쉽지 않은 산업 자원이자 전략 자원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여기에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심리적 촉매로 더해졌다. 전 세계 은 공급의 60~70%를 통제하는 중국이 2026년 1월 1일부터 은 수출을 제한할 예정이라고 알려졌다. 이에 대해 일론 머스크가 "은은 많은 산업 공정에 필수적"이라고 발언하며 은을 단순한 원자재가 아니라 글로벌 공급망 리스크를 방어하는 수단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산업적 필수성과 투자 수요가 동시에 작용하면서 은 공급에는 전례 없는 압박이 가해졌다.
This is not good. Silver is needed in many industrial processes.
— Elon Musk (@elonmusk) December 27, 2025
통화정책의 변화 역시 원자재에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금리인하 기조로의 전환은 이자를 지급하지 않는 실물자산을 보유하는 데 따른 기회비용 부담을 줄이고 있다. 금, 은 같은 귀금속은 다시 '보유할 이유가 있는 자산'이 되고 있다. 중앙은행의 금 비중 확대, 귀금속 ETF로의 자금 유입 등 최근 몇 달간 금융시장에서도 이 같은 흐름이 확인된다.
투자자가 진짜 원하는 것, '스토리' 아닌 '현실'
한편, 기술주와 암호화폐 시장은 금리인하 국면과 지정학적 불확실성 속에 밸류에이션 재평가를 받고 있다. AI 시대를 상징하는 엔비디아조차 기대가 과도하게 선반영된 것 아니냐는 질문을 받는다. 단기적 방향이 안갯속에 갇히자 미래의 서사나 장밋빛 내러티브에 대한 베팅이 줄어든 것이다.
본질적 가치와 실사용 측면에서 보다 대중적인 검증 절차를 남겨두고 있는 암호화폐 시장은 10월 이후 매도 국면에서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비트코인은 연초 대비 약 6% 하락했고 10월 사상 최고가였던 12만6000달러 대비 약 28% 떨어졌다. 이더리움과 주요 알트코인은 더 큰 낙폭을 보였다.
30일 포브스 기고에서 샌디 카터 언스타퍼블 COO는 "엔비디아는 인공지능의 미래를 상징하고 암호화폐는 탈중앙화된 디지털 금융을 대표하는 한편 은은 산업적 필수성과 전통적 가치 저장 수단이라는 두 가지 속성을 동시에 지닌 자산"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번 은 가격 급등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작인지 일시적 현상인지 알 수 없지만 경제적 불확실성이 지속되는 환경에서 주목할 만한 일"이라며 "투자자들에게 '가치'와 '취약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사건"이라고 진단했다.
은 급등 현상은 미래 성장 서사에 대한 신뢰가 약해지고, 실물 수요와 구조적 필요성이 확인된 자산으로 자금이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장은 ▲이미 실물 수요가 존재하는 것 ▲구조적으로 공급이 제한되고 단기적으로 늘릴 수 없는 것 ▲거시경제 변화에 대한 방어력, 즉 금리인하, 지정학적 갈등, 통화 불안에서 확실한 역할과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에 가치를 뒀다. '언젠가 될 것'이 아니라 '이미 작동하는 것', 불확실한 옵션보다 현재의 현금 흐름과 구조적 필요성이 확인된 자산에 자금을 배치했다.
'쓸모'를 증명하기 시작한 암호화폐
암호화폐 시장의 가격 흐름은 부진하지만, 실제 가치를 만들어내는 영역이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실물자산(RWA) 토큰화다. 월가 투자은행 캔터 피츠제럴드는 토큰화된 국채, 신용 상품, 주식 등의 가치가 올 들어 세 배 증가해 185억 달러에 달했으며, 금융기관의 참여 증가로 2026년 500억 달러 규모를 전망한다고 밝혔다.
토큰화 시장은 실제 수익 성과를 내고 있다. 토큰화 전문 기업 '시큐리타이즈'는 30일 "블랙록의 토큰화 머니마켓펀드 '비들(BUIDL)'이 출시 이후 약 1억 달러의 배당을 지급했다"고 밝혔다. 이는 단기 미국 국채와 현금성 자산을 기반으로 한 토큰화 상품이 기관급 규모에서 작동할 수 있음을, 실제적인 수익 창출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BlackRock’s BUIDL becomes the first tokenized Treasury to pay out $100M in lifetime dividends.
— Securitize (@Securitize) December 29, 2025
Securitize on top. pic.twitter.com/9uq2Bt6aCC
이처럼 전통 금융·결제 부문의 블록체인 채택은 기술 실사용과 대중적인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거래·결제의 동시성, 조합성(composability)과 같은 기술 혁신성뿐 아니라 '사용성'에 초점을 맞춘 발전이 이뤄지고 있다. 이러한 흐름이 시장에 바로 반영되진 않을 수 있지만 암호화폐가 '쓸모를 먼저 증명하는 단계'에 진입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완성된 결론은 아니지만 암호화폐는 제대로 된 '시작점'에 와있다.
2025년 12월 4일 뉴욕타임스 딜북 서밋에서 전통 금융의 정점에 선 '블랙록'의 CEO 래리 핑크와 암호화폐 혁신 주자 '코인베이스'의 CEO 브라이언 암스트롱이 나란히 앉은 장면은 암호화폐가 현실 금융의 핵심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블랙록 CEO는 비트코인을 디지털 금이자 경제 불확실성에 대한 방어 자산이라고 평했고, 두 사람 모두 "모든 자산을 블록체인 위에 기록하는 토큰화가 금융의 현재이자 미래를 형성할 핵심 기술"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서사가 아닌 '실체'로 신뢰되는 비트코인
약세장에서도 비트코인을 '금'이나 '은'처럼 실체가 있는 자산으로 인식하는 흐름은 이어지고 있다. 디지털 자산을 기업의 재무전략(DAT)으로 채택한 스트래티지와 비트마인은 약세장이 한창인 이달에도 여러 차례 자산을 추가 매수하며 이러한 자산 실체와 효용에 대한 확신을 나타냈다.
비트코인은 최종 공급량이 2100만 BTC로 고정돼 있으며, 채굴 보상은 4년마다 절반으로 줄어든다. 이로 인해 2140년이면 더 이상 새로 채굴할 비트코인은 남지 않는다. 공급 경로와 총량이 사전에 정해진, 드문 자산 구조다.
경제학자 사이페딘 아모스는 "법정화폐를 만들긴 어렵지 않지만, 금과 비트코인은 채굴이 어렵다"면서, 비트코인은 법정화폐처럼 부채로 만들어진 화폐가 아니라 '재화'라고 설명했다. 즉시 소유 및 사용 가능하며 가치를 지닌, 미래의 약속이나 부채에 의존하지 않는 '현재의 재화(present good)'로 "사람들이 다시 저축하고 가치를 미래까지 보존할 무언가를 보유하게 해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최근 이란 법정화폐 '리알화'의 급락 사태와 관련해서도 비트코인은 다시 한 번 통화 붕괴 환경에서 가치를 보호할 수단으로 언급됐다.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리알화는 6월 이스라엘과의 전쟁 이후 구매력이 40% 이상 하락했다. 달러당 약 140만 리알로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10월에는 멜리 국영은행이 파산해 4200만명의 자산이 위험에 처했다. 헌터 홀슬리 비트와이즈 CEO는 30일 "경제적 오판은 과거·현재·미래를 관통하는 이야기"라며 "비트코인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은이 보여준 것, '자산 귀환의 조건'
은 가격 급등은 특정 자산의 일시적 반등일 수 있지만 시장이 불확실성 속에 자산을 평가하는 가장 기본적인, 흔들리지 않는 기준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투자자들은 '자산은 실제로 쓰이는가', '공급은 통제 가능한가', '불확실성 속에서도 기능하는가를 다시 묻는다.
시장에서 실망이 기대로 바뀌는 건 흔한 일이다. 인공지능 성장 둔화 가능성부터 예기치 못한 정책 충격까지 다양한 리스크가 존재하지만, 2026년에도 주식시장이 상승 흐름을 지속할 것이라는 낙관적 컨센서스는 이미 형성돼 있다. 85일 이상 고점을 크게 하회한 비트코인이 구조적인 상승세를 유지하고, 암호화폐 산업이 보다 안정적으로 성장할 것이란 확신도 여전하다.
연준 리더십 교체와 금리 인하 기조에 따른 유동성 재개, 미국 클래리티 법안 통과를 통한 규제 완화 등 예정된 변화도 2026년 시장에 다시 훈풍을 불어넣을 수 있다. 암호화폐 시장은 조금 더 가볍게 날아오를 수 있는 새해의 문턱에서 만난 은 급등 현상은 결국 자금은 쓸모가 입증된 자산으로 돌아간다는 것, 그 자산은 가격이 흔들리더라도 다시 선택받는다는 점을 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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