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과 금융 당국이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도입을 위해 은행과 기업이 참여하는 ‘컨소시엄’ 모델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신뢰도 높은 은행이 발행을 주도하고, 기업이 기술을 지원하는 모양새를 갖추겠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안정’과 ‘혁신’을 모두 잡은 절충안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혁신은 없고 기존 금융 기득권의 ‘밥그릇 지키기’와 행정 편의주의가 빚어낸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우리가 탁상공론을 벌이는 사이 시장은 이미 답을 내놓았다. 최근 해외 핀테크 기업들이 주도한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KRWQ’가 등장해 단기간에 거래량 10억 원을 돌파한 현상을 보라. 정부의 허가증도, 은행의 거창한 컨소시엄도 없었지만, 시장의 수요와 기술만으로 ‘디지털 원화’가 국경을 넘어 유통되기 시작했다. 이는 개탄할 일이 아니다. 혁신이란 본래 틈새를 비집고 흐르는 물과 같아서, 규제로 둑을 쌓는다고 막을 수 있는 게 아님을 증명한 명백한 신호다.
지금 글로벌 금융 시장은 ‘총성 없는 통화 전쟁’ 중이다. 미국을 보라. 서클이나 테더 같은 민간 테크 기업들이 달러 패권을 디지털 세계로 확장하고, 코인베이스는 사용자에게 이자를 돌려주기 위해 규제 당국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보수적 금융의 대명사인 이웃 나라 일본조차 다르다. 과감한 법 개정으로 은행뿐 아니라 송금업자에게도 발행 문을 열어줬다. 그 덕에 ‘JPYC’ 같은 스타트업이 발행하는 엔화 스테이블코인이 시장에 안착해 실생활 결제까지 파고들고 있다. 미·일 양국이 민간의 ‘효용’과 ‘혁신’에 집중할 때, 한국만 우물 안 개구리 신세다.
반면 한국의 논의는 어떤가. KRWQ와 같은 민간의 속도전을 보고도 여전히 ‘어떻게 하면 사고가 안 날까’에만 매몰돼 은행 울타리 안으로 혁신을 가두려 한다. 은행 연합체 형태의 컨소시엄은 태생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의사결정은 느릴 것이고,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사용처는 제한될 것이다. 무엇보다 사용자에게 돌아갈 혜택을 원천 봉쇄한 스테이블코인은, 송금 속도가 조금 빠른 ‘디지털 상품권’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모바일 뱅킹망을 갖춘 한국에서 누가 굳이 이런 불편한 코인을 쓰겠는가.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정체성’이다. 정부의 엄격한 통제를 받는 은행들이 모여, 이자도 주지 않고, 국내에서만 통용되는 코인을 발행한다면, 이것이 한국은행이 발행하는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와 무엇이 다른가. 민간의 창의성과 역동성을 거세한 채 무늬만 민간 주도인 ‘관제 코인’을 만들 바에는 차라리 국가가 보증하는 CBDC가 훨씬 효율적이고 안전하다. 컨소시엄 모델은 자칫 민간의 혁신도 죽이고, 공공의 효율성도 놓치는 ‘옥상옥’이 될 공산이 크다.
진정한 혁신은 시장의 경쟁에서 나온다. KRWQ가 보여주듯 기술은 이미 국경을 넘었다. 미국과 일본이 왜 발행 주체를 민간에 과감히 개방했는지 곱씹어봐야 한다. 엄격한 준비금 규제만 둔다면, 네이버든 카카오든 토스든 기술력 있는 기업들이 은행과 동등하게 경쟁하며 더 나은 서비스를 내놓게 해야 한다.
어설픈 타협은 시장의 도태를 부를 뿐이다. 세계는 국경 없는 디지털 화폐 전쟁을 벌이는데, 우리만 은행 연합이라는 ‘갈라파고스’에 갇혀 자화자찬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국회와 당국은 기득권을 위한 타협안이 아니라,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진짜 ‘디지털 원화’가 나올 수 있는 판을 깔아야 한다. 그것이 안 된다면 차라리 논의를 접고 CBDC에 집중하는 편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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