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4천 년 전 청동기 시대 유라시아 초원을 누볐던 가축에서 흑사병을 유발하는 균이 발견되면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염병 중 하나로 꼽히는 이 질병의 기원과 확산 경로에 대한 이해가 새롭게 바뀌고 있다.
독일 막스플랑크 감염생물학연구소, 미국 하버드대학교·아칸소대학교, 서울대학교 등으로 구성된 국제 공동 연구진은 러시아 유라시아 대초원의 아르카임이라는 청동기 시대 목축 유적에서 양의 뼛조각과 이빨을 분석한 결과, 페스트균(Yersinia pestis)에 감염된 생물학적 흔적을 확인했다고 2025년 8월 12일 발표했다. 이 균주는 당시 사람에게도 흑사병을 유발했던 후기 신석기-청동기 시대 계통(LNBA)의 페스트균과 거의 동일한 특징을 갖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번 분석이 중요한 이유는 환자 유골이 아닌 가축 유해에서 초기 형태의 흑사병이 검출되었다는 점이다. 즉, 지금까지 주로 인간 유해를 통해 추적되던 고대 질병의 연구가, 사육된 동물에서도 발굴되며 질병의 전파 매개체로서 가축의 역할이 보다 뚜렷하게 조명된 것이다. 연구팀은 이를 통해 초기 흑사병이 인간-가축-야생동물 간 상호 접촉을 거쳐 오랜 세월 유라시아 전역에 걸쳐 확산됐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특히 해당 균주는 중세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은 '벼룩 매개 페스트균'과는 다르게, 벼룩을 통해 전염되는 기능을 가진 핵심 유전자가 결여돼 있었다. 이는 초기 형태의 페스트균이 인간에게 전염되는 방식이 지금과는 달랐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당대 사람과 양이 어떻게 감염되었는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지만, 인간과 동물 모두 같은 영역에서 같은 균에 노출되었다는 점은 매우 설득력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연구에 참여한 하버드대학의 크리스티나 와리너 교수는 이러한 발견이 없었다면, 이 유전자 자료를 또 다른 인간 감염 사례로 오인했을 것이라면서, 사람과 가축 간 질병 유전체의 유사성이 생각 이상으로 높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실제로 당시 유라시아 초원 지역에서는 양을 비롯한 가축 사육이 활발해졌고, 이는 야생 페스트균의 보유 숙주와의 접촉 빈도를 끌어올렸을 것이라 분석됐다.
이번 성과는 고대 DNA 분석기술이 발전하면서 인류 사회의 변화와 질병의 확산 양상에 대해 보다 입체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만든 예라 할 수 있다. 특히 가축화 이후 인류가 경험한 인수공통전염병(동물에서 인간으로 전이되는 병)의 초기 확산 메커니즘을 보여주는 첫 사례로 평가된다.
이 같은 흐름은 향후 고대 문명에서 발생한 감염병의 역사적 양상을 새롭게 규명하고, 현대 전염병 대응 전략에 대한 장기적인 통찰을 제공할 가능성이 있다. 인류와 가축, 그리고 질병 간의 삼각관계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도 활발히 이어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