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중견 테크 기업들, '규제연합' 결성…미들테크의 반격 시작됐다

| 김민준 기자

기술 분야에서도 타이밍은 성공의 핵심이다. 제품 출시나 투자 유치만큼이나 규제 대응도 시기를 놓치지 않고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 유럽의 중견 기술 기업들이 한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업계 전반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난달, 프랑스 스타트업 유보(Yubo)는 레딧(Reddit), 디스코드(Discord), 핀터레스트(Pinterest), 오토매틱(Automattic), 패트리온(Patreon), 데일리모션(Dailymotion)과 함께 ‘미들테크 유럽(Middle Tech Europe, MTE)’을 출범시켰다. 이는 EU의 디지털 정책 환경에서 대기업 중심의 규제 프레임에 반기를 들고, 다양성을 반영한 비례적 규제를 요구하기 위한 연대다. 대형 플랫폼을 겨냥해 설계된 규제들이 중견 업체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면서 운영 부담이 커지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연합이다.

MTE는 단순한 조직 결성이 아니라, 업계 중간 허리 기업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유보의 공동 창업자 사샤 라지미(Sacha Lazimi)는 “우리는 빅테크가 아닌, 그 사이 중간 지대에 있는 기업들”이라며 “청소년 보호, 데이터 보안, 창작자 수익화와 같은 영역에서 특화된 구조를 갖고 있음에도 규제는 이런 차이를 반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들 기업은 글로벌 이용자를 거느리고 있지만 조직 구조는 소규모이며, 사용자 보호와 신뢰 확보에 지속적으로 투자해왔다.

이러한 대응 중 하나로 유보는 2022년, 자사 플랫폼에서 모든 이용자의 나이를 검증하는 정책을 세계 최초로 도입했다. 이는 단순한 규제 준수를 넘어 미래지향적 투자의 일환으로, 회사는 이를 통해 디지털서비스법(DSA), 인공지능법(AI Act) 등 EU의 새 기준 마련에 정당한 발언권을 확보했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중견 기술 플랫폼들의 정책관여는 단지 리스크 대응을 넘어 경쟁우위 확보 수단으로 진화하고 있다. 특히 유럽의 규제가 글로벌 표준으로서 위상을 높이면서, 미국 기반의 스타트업들도 예외는 아니다. 이미 MTE 회원사 중 상당수가 미국 기업이며, EU의 규제 기준이 미국 워싱턴 D.C.의 입법 논의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정책 트렌드를 가늠하는 선행지표로 주목되고 있다.

사샤 라지미는 “정책 대응은 더 이상 대기업만의 문제도, 성장 이후에나 고려할 사안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스타트업 창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남겼다. 규제를 기술 인프라처럼 설계하라, 규제가 발효되기 전에 행동하라, 동종 기업 간 연대하라, 그리고 정책 당국과 신뢰 기반을 평소에 다져야 한다는 것이다.

기술 산업에서 규제는 ‘정부 대 거대 플랫폼’의 이분법으로만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시장의 또 다른 주체, 바로 중견 기업들이 존재감을 드러낼 차례이다. 오늘 이들의 목소리가 규제의 방향을 바꾸고, 내일 이들이 생존하고 성장할 토대를 다질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그 목소리를 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