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벤처투자 시장이 다시 한 번 '딥테크'에 대한 재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웹 브라우저와 SaaS로 대표되던 기존의 벤처투자 중심축이 클라우드 기반 제조업 솔루션, 인공지능(AI) 자동화 시스템 등 물리적 생산 분야로 옮겨가고 있는 흐름이 뚜렷해지고 있다. 특히 기존 하드웨어 산업이 지닌 병목 지점을 AI가 빠르게 해소하면서, 이른바 ‘브라우저 너머’의 기회가 열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러한 시각은 클라우드 기반 AI 제조 플랫폼 기업인 CloudNC의 공동 창업자이자 CEO인 테오 새빌(Theo Saville)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새빌은 CNC 기계 가공 분야에서 반복적이고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CAM 프로그래밍 작업을 AI가 자동화함으로써, 공정 시간을 일 단위에서 분 단위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 그의 AI 솔루션은 기존에 수작업으로 진행되던 수천 줄의 G코드를 스스로 생성하며, 한 공장에서 수백만 달러 수준의 잠재 생산 능력을 끌어올리는 데 기여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물리 생산 기반 산업은 벤처캐피털에게 외면 받아왔다. 하드웨어 특성상 초기 개발과 시장 적용까지 오랜 시간이 소요되고, 회수 기간 또한 길며, 반복 가능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최근 들어 AI가 공정 통합과 자동화를 가능케 하면서, 벤처 투자 계산법이 변화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특히 매출 총이익률이 SaaS 수준으로 높아지고 판매 주기가 짧아지면서, 본질적으로는 하드웨어인 제품이 ‘소프트웨어처럼 작동’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새빌은 벤처 투자에서 통할 수 있는 제조·딥테크 스타트업의 요건으로 네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는 '절박한 문제 해결(bleeding-neck problem)'로, 실제 예산이 투입되는 문제여야 한다. 둘째는 '거대하고 파편화된 시장', 셋째는 '마찰 없는 도입 가능성’, 그리고 넷째는 ‘지속적 진입장벽 구축’이다. CloudNC는 이 네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사례로 꼽힌다. 특히 자체 공장에서 직접 데이터를 수집해 AI를 학습시키는 방식으로 데이터를 내재화하며, 후발주자의 추격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 같은 흐름은 정밀 기계가공을 넘어 복합재료 적층, 폐수 분석, 마이크로 풀필먼트와 같은 영역에서도 확대되고 있다. 특히 미국과 유럽 등 주요 국가들이 리스크 분산 및 기술 주권 확보 차원에서 제조 생산기반을 자국 내로 유턴시키려는 정책 기조를 강화하면서, 해당 산업에 대한 공공 지원이 늘고 있는 점도 시장 형성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단순히 솔루션을 도입하는 기업들이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는 구조도 현실화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벤처 업계 전반에 걸쳐 이 영역에 대한 이해도는 높은 수준이 아니다. 많은 일반 벤처투자자들은 여전히 브라우저 기반 서비스만을 중심으로 투자전략을 수립 중이며, 제조업 현장에 대한 기술적 이해가 부족하다는 점이 진입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시장에서는 이러한 정보 비대칭을 극복하고 실체 기반 제조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소수 투자자와 창업자들이 차세대 테슬라를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한다.
테오 새빌은 “AI가 이제 전 세계의 물리적 생산 과정을 ‘제어(control)’하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며 “수개월 걸리던 절차를 수분 내로 압축하는 스타트업들이 향후 10년의 벤처 지형을 주도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결국 이 흐름을 포착한 자본만이 다음 기회의 문이 공장 철문을 두드릴 때, 문을 열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