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퀀텀, 10억 달러 유치…‘100만 큐비트’ 양자컴퓨터 현실화 시동

| 김민준 기자

양자 컴퓨팅 스타트업 사이퀀텀(PsiQuantum)이 초대형 양자 컴퓨터 구축을 위한 대규모 자금 조달에 성공했다. 사이퀀텀은 2025년까지 100만 큐비트 이상의 범용 양자 컴퓨터를 실현하겠다는 계획을 밝히며, 이를 위해 10억 달러(약 1조 4,400억 원)에 달하는 시리즈 E 펀딩을 유치했다고 발표했다.

이번 투자에는 블랙록(BlackRock)을 비롯해 싱가포르 국부펀드 테마섹(Temasek), 베일리 기포드(Baillie Gifford) 등 글로벌 기관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로써 사이퀀텀의 기업 가치는 세 배 가까이 뛰어올라 70억 달러(약 10조 800억 원)를 기록하게 됐다. 지난 2021년 4억 5,000만 달러 펀딩 당시에는 30억 달러 수준이었다. 이어 맥쿼리캐피털, 엔비디아(NVDA)의 벤처 부문인 NVentures, 애디지캐피털 등을 포함한 신규 투자자들이 다수 합류했고, 기존 주주인 T로우프라이스와 서드포인트벤처스, 블랙버드 등도 추가 투자에 나섰다.

사이퀀텀이 목표로 삼는 양자 컴퓨터는 ‘실용 수준’의 안정성을 갖춘 100만 큐비트급 범용 양자 컴퓨터다. 큐비트는 고전 컴퓨터의 비트와 유사한 계산 단위지만, 고전 비트와 달리 0과 1을 동시 표현할 수 있는 ‘중첩(superposition)’ 상태로 인해 복잡한 계산을 병렬로 처리할 수 있다. 문제는 큐비트가 외부 간섭에 민감하다는 점으로, 오류 보정이 실용화의 핵심 과제로 꼽힌다. 사이퀀텀은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선 단순한 과학을 넘어서는 대규모 엔지니어링 도전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사이퀀텀의 공동 창업자이자 CEO인 제레미 오브라이언(Jeremy O’Brien) 교수는 “진정한 양자 컴퓨팅의 시대는 100만 큐비트 규모의 내결함성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서 시작된다”며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 회사를 설립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회사는 광학 기반의 ‘집적 광자 칩셋’을 핵심 기술로 활용 중인데, 최근에는 고성능 광 스위치 구현을 위해 BaTiO3(바륨타이타네이트)라는 신소재까지 양산에 도입했다.

양자 컴퓨팅이 상용화되면 신약 개발, 유전자 해독, 신소재 설계 등 분야에서 지금껏 불가능했던 시뮬레이션이 가능해진다. 특히 슈퍼컴퓨터와 결합한 하이브리드 시스템에서는 수개월 걸리던 시뮬레이션이 수 분 내에 끝날 수 있다는 기대도 나온다. 사이퀀텀은 2028년까지 대규모 양자 기계를 완성하겠다는 계획이다.

이번 자금 조달에는 엔비디아와의 협업도 포함됐다. 양사는 GPU와 양자 칩셋 통합을 염두에 둔 소프트웨어 및 알고리즘 공동 개발에 나설 예정이다. 이는 AI 학습 가속 기술과 양자 연산을 결합한 구조로, 향후 슈퍼컴퓨터 수준 이상의 연산 능력을 구현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블랙록의 토니 김(Tony Kim) 테크 투자 책임자는 “지난 반세기를 이끈 AI가 고전 컴퓨팅에 기반했다면, 이제는 물리 세계를 근본적으로 이해하고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양자 기반 시대가 열리는 분기점”이라고 평가했다.

사이퀀텀은 냉각, 제어, 통신 설계까지 자체 개발해 오고 있다. 전통 양자 시스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샹들리에 스타일의 극저온 장비 대신, 데이터센터용 모듈형 랙에 장착 가능한 고밀도 냉각 솔루션을 선보였다는 점도 주목된다. 기존과 다른 방식인 광 기반 통신 인프라를 적극 채택한 점도 사이퀀텀 만의 차별점으로 부각된다.

이번 투자 라운드는 양자 산업 전반에서 가속화되는 경쟁 구도 속에서 진행됐다. 지난 주에는 큐안티늄(Quantinuum)이 6억 달러(약 8,640억 원)를 조달하며 100억 달러의 기업 가치를 인정받았고, 구글은 2024년 말 자사의 최대 에러 보정 양자칩 ‘윌로우(Willow)’를 공개한 바 있다. IBM 역시 2029년까지 자사의 양자 시스템 ‘스타링(Starling)’을 통해 2만 배 연산 성능 향상을 목표로 하는 공식 로드맵을 발표했다.

최고 기술 집약 산업 중 하나인 양자 컴퓨팅 분야는 이제 머지 않은 미래의 기술이 아니라, 실체적 투자 유치와 로드맵을 바탕으로 상용화를 목전에 둔 산업으로 빠르게 전환되고 있다. 이번 사이퀀텀의 10억 달러 조달은 그 흐름의 중심에서 중요한 이정표로 기록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