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컴퓨터 현실화에 보안 지형도 재편… 기업들 '포스트 양자' 질주

| 김민준 기자

양자컴퓨팅의 상용화가 가시화되면서 글로벌 보안 환경이 근본적으로 재편되고 있다. 이에 따라 기업들은 새로운 포스트 양자 암호 표준을 도입하고, 디지털 신뢰 체계를 정비해 나가며 발 빠르게 대응에 나선 모습이다. 이러한 흐름은 미국 보안인증 전문업체 디지서트(DigiCert)가 주최한 ‘월드 퀀텀 레디니스 데이(World Quantum Readiness Day 2025)’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다.

디지서트 CEO 아밋 시나(Amit Sinha)는 이 행사에서 “이제는 대부분 기업들이 더 이상 미룰 수 없음을 인식하고 있다”며 기업들이 양자 안전 신뢰 인프라로의 전환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나는 IBM, 구글(GOOGL), 마이크로소프트(MSFT), 아마존웹서비스(AWS) 등 하이퍼스케일 빅테크들이 잇달아 고성능 양자 프로세서를 공개하며 시장 개화에 속도가 붙었다고 진단했다. 그는 “지금은 트랜지스터 초기 시대와 유사하다”며 향후 몇 년 내로 '챗GPT 발생 당시 만큼의 대변화'가 양자기술에서도 일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장에서 가장 주목받은 인사이트 중 하나는 양자 보안 대비가 더 이상 개념 차원의 논의를 넘어서 실제 구현 단계에 진입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DXC 테크놀로지는 자사 전 직원들을 대상으로 ‘고객 제로(Customer-Zero)’ 전략을 펼쳐 내부 테스트를 선제적으로 시행하고 있으며, 클라우드플레어(Cloudflare)는 이르면 올해 말까지 수동 접속 요청의 절반 이상을 포스트 양자 암호화로 보호하겠다는 계획을 공개했다. 특히 새로운 암호 키 크기 도입과 기존 시스템 간 호환성에 맞서는 작업이 지연 요인이 되고 있지만, 단계별 전환 및 벤더 협업으로 기술 장애를 극복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와 함께, 기업들은 기존 공개키 인프라(PKI)를 유지한 채 양자 기반 키와 하이브리드 형태로 연결하는 절충안을 고심하고 있다. 디지서트의 팀 홀러빅 부사장은 “만약 인터넷을 1년간 중단하고 모든 인프라를 한 번에 바꾼다면 훨씬 쉬운 문제일 것”이라며 “현실적으로는 고전 및 양자 암호 체계를 동시에 운용하면서 신뢰 체계를 끊김 없이 유지하는 점이 가장 큰 난제”라고 말했다.

일부 금융기관과 글로벌 컨설팅 기업들은 보다 전진적인 도입을 시도하고 있다. 웰스파고(Wells Fargo), 액센추어(Accenture), 디지서트 등의 기업은 실전 테스트와 기술 예비군 구축을 중심으로 디지털 인증서 시스템을 이미 현대화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모듈 격자 기반 포스트 양자 알고리즘(ML-KEM, ML-DSA)의 도입도 늘고 있다.

한편, 딜로이트의 콜린 소우터 디지털 보안 총괄은 “기존 데이터를 안전하게 저장하더라도, 언젠가 등장할 양자 컴퓨터는 이를 한순간에 해독할 수 있다”며 미래 위협에 대비한 조기 암호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디지서트는 이런 움직임의 연장선에서 디지털 서명 알고리즘 고도화까지 플랫폼 전환의 영역을 넓히고 있다.

결국 양자 기술의 발전 속도가 예상을 웃도는 가운데, 이를 둘러싼 기업들의 대응 전략도 더욱 현실적이고 체계적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과거처럼 ‘언젠간 도래할 기술’을 기다리기보다는, ‘지금 이미 필요한 조치’로 인식하며 행동에 나서야 하는 시점이다. 다시 말해, 그 ‘준비된 자’만이 양자 시대의 승자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명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