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흔든 실리콘밸리… 트럼프·AI·코인 삼중 격돌에 美 테크판 뒤흔들

| 김민준 기자

정치와 기술이 다시 충돌하고 있다. 세일즈포스(CRM)의 마크 베니오프(Marc Benioff)는 최근 샌프란시스코에 주 방위군을 배치하자며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를 긍정적으로 평가해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와 동시에 암호화폐 시장의 회복세와 함께 트럼프 대통령의 입지가 강화되는 모습이 뉴욕 증시와 벤처 생태계를 뒤흔들고 있다.

드림포스 2025 행사에서 세일즈포스는 자사 플랫폼 전반에 '에이전트 중심 AI(agentic AI)'를 도입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발표하며 주목을 받았다. 베니오프는 '에이전트포스 360(Agentforce 360)'이라는 신규 플랫폼을 출범했으며, 이 플랫폼에는 인간의 의도를 해석하는 '아틀라스 추론 엔진'과 최신형 생성형 AI 에이전트를 배치할 수 있는 '에이전트포스 빌더' 기능이 포함됐다.

그러나 베니오프의 정치적 발언은 기술적인 성과를 가리게 했다. 그가 트럼프 행정부의 주 방위군 배치를 환영한다고 밝히자 론 콘웨이 등 실리콘밸리의 영향력 있는 투자자들은 세일즈포스 재단 이사진에서 잇따라 사임했고, 로렌 파월 잡스는 그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미국 사회 전반의 정치 양극화와 기술 산업의 세대 교체 흐름이 맞물린 결과로 분석하고 있다.

한편, 암호화폐 시장도 트럼프 행정부의 규제 완화 기조 속에서 빠르게 회복 중이다. 뉴욕증권거래소(NYSE)의 모기업 인터콘티넨탈 익스체인지(ICE)는 최근 예측시장을 기반으로 한 스타트업 '폴리마켓(Polymarket)'에 20억 달러(약 2조 8,800억 원)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멈췄던 자본 흐름이 살아나면서, ‘핵겨울’로 불리던 반(反)암호화폐 시기의 사업 모델들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존 퍼리어 실리콘앵글 공동창업자는 “이제는 진짜 창업가 정신이 살아남은 시장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AI 업계 또한 빅테크 간 경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오픈AI(OpenAI)는 브로드컴(AVGO)과 손잡고 맞춤형 AI 인프라를 총 10GW 규모로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며 칩 분야에서도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이미 OpenAI는 AMD 하드웨어를 대규모로 선매입하는 등 독자적인 슈퍼컴퓨팅 생태계 조성을 추진 중이다. 존 퍼리어는 이를 두고 “오픈AI는 이제 차세대 기술 리더로 확실히 자리 잡고 있다. 칩과 에너지를 장악하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 같은 투자 확장의 지속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OpenAI가 연간 약 130억 달러(약 18조 7,000억 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지만 수익 모델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데이브 벨란테는 많은 기술 기업들의 AI 투자가 '자본 지출(CapEx)' 중심으로 이루어진 점을 지적하며, “설치된 GPU 대부분이 20% 수준의 저조한 가동률에 머물고 있어, 자산 가치는 2년 내 급감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오라클(ORCL)도 이 전선에 합류해 슈퍼클라우드 구현과 AI 네이티브 플랫폼 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최근 AI 기능이 탑재된 자체 데이터베이스 및 AI 레이크하우스 플랫폼을 발표하며 단순 SaaS를 넘어선 새로운 접근을 시도 중이다. 벨란테는 “오라클은 이제 아마존, MS, 구글, 그리고 온프레미스까지 아우르는 다중 클라우드 전략에서 가장 앞선 기업”이라고 평가했다.

AI 기술의 대중화가 가속화하는 지금, 시장은 본질적인 수익 창출 모델 없이 기술만 앞선 기업들과, 기존 SaaS에 AI를 접목하려는 기업들 간의 구조적 격차가 더욱 뚜렷해질 전망이다. 퍼리어는 “향후 몇 년 내에 SaaS는 결국 AI 네이티브 기업에 대체되든, 백엔드로 전환되든 판이 바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부상, AI 인프라에 대한 대규모 투자, 그리고 암호화폐의 반등. 이 세 가지 흐름이 동시에 격돌하며 미국 테크 업계는 지금 새로운 전환점에 서 있다. 산업 지형은 바뀌고 있으며, 이제는 누가 기술과 정치 양측 모두를 장악할 수 있느냐가 시장 우위의 관건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