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이제는 기업 안에서 만든다… '세일리'가 보여준 실험의 미래

| 김민준 기자

스타트업은 주로 차고나 기숙사에서 창업된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최근엔 성장 기업 내부에서 새로운 스타트업이 탄생하는 방식도 급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모델은 창업 초기 단계의 민첩함과 기존 기업 인프라의 안정성을 동시에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바로 그런 방식으로 탄생한 서비스가 여행용 eSIM 플랫폼 '세일리(Saily)'다. 세일리는 보안 소프트웨어 기업 '노드 시큐리티(Nord Security)' 내에서 설립 초기부터 독립된 팀으로 운영되며, 단 19주 만에 제품을 출시한 후 1년여 만에 200개 이상의 국가에서 수백만 명의 이용자를 확보했다. 핵심은 완전히 처음부터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검증된 기술과 시스템을 재활용하며 빠르게 시장 반응을 파악하고 대응한 데 있었다.

세일리를 이끄는 비킨타스 막니카스(Vykintas Maknickas) CEO는 시장성과 실행 가능성이라는 두 가지 리스크를 효과적으로 줄이려면, 규모 있는 기업 내부에서의 실험이 뛰어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기존 시스템, 결제 인프라, 앱 개발 역량 등을 최대한 활용하면서도 작은 팀이 빠르게 방향을 전환할 수 있도록 자율성과 집중된 지원을 동시에 제공받았다고 설명했다.

일반적인 스타트업이 흔히 겪는 ‘제품-시장 적합성'에 더해, 세일리는 '제품-조직 적합성'이라는 새로운 개념도 제시한다. 이는 새로운 제품이 기존 조직의 기술 역량과 얼마나 잘 맞아떨어지느냐를 평가하는 것이다. 세일리의 경우, VPN, 웹 보호, 광고 차단 같은 노드 시큐리티의 기존 강점을 여행 통신 서비스에 그대로 접목해 실행 속도와 고객 신뢰를 동시에 확보했다.

경쟁 구도 또한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세일리는 비슷한 서비스를 운영하는 경쟁사의 채용 동향과 신제품 출시 현황, 투자 뉴스를 모니터링하며 시장 흐름을 민감하게 파악했다. 덕분에 개인 정보를 보호하고 안정적인 접속 환경을 제공하는 네트워크 중심 보안 기술을 핵심 차별화 요소로 삼을 수 있었다.

기술보다 더 어려운 점은 문화적 간극을 극복하는 일이었다. 대기업은 절차와 정합성 중심인 반면, 스타트업은 속도와 자율성을 중시한다. 세일리는 회사 내부의 작은 독립 체제로 설계돼 주요 의사결정은 자체적으로 내리되, 법무, 디자인, 재무 등 기본적인 지원은 본사로부터 받는 방식으로 양쪽의 장점을 융합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속도와 반복 실험을 기반으로 한 학습이다. 실제로 세일리는 출시 이후 수치 기반의 성과 측정에 집중했다. 예를 들어, 외부 기관의 테스트 결과를 통해 자사의 광고 차단 기능이 데이터 사용량을 약 28.6% 절감하는 효과가 있다는 점을 확인했고, 이러한 수치는 투자와 마케팅 전략의 핵심 지표로 쓰였다.

이러한 창업 방식은 예비 창업자뿐 아니라 기업 운영자 모두에게 유용한 교훈을 제공한다. 시장 수요와 실행력 평가 방식, 기존 인프라의 전략적 활용, 제품 출시 전후의 핵심 지표 측정 등은 다른 기업에도 적용 가능한 원칙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성장 기업 내부에서 혁신의 기회를 포착하고, 실질적인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세일리는 아직 성장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지만, 그 성장 방식은 업계 전체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앞으로 수많은 기업 내부에서 제2, 제3의 스타트업이 등장하게 될 가능성이 열려 있다. 과감하게 자율성을 부여하고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다면, 큰 결과는 놀랍도록 짧은 시간 안에 현실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