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양자 컴퓨팅’ 주도권 확보를 위해 회원국 공동 대응에 속도를 내고 있다. 올해 시행 예정인 ‘EU 양자 컴퓨팅법’을 앞세워 연구와 산업 투자를 묶고, 슈퍼컴퓨터와 양자 시스템을 결합한 실험 환경까지 넓히는 모습이다.
EU는 회원국별로 흩어진 양자 기술 연구와 혁신 역량을 하나로 묶어 글로벌 경쟁력을 끌어올리겠다는 구상이다. 핵심은 올해 발효 예정인 ‘EU 양자 컴퓨팅법’이다. 이 법안은 EU 차원의 연구 협력과 국가별 혁신 정책을 조율하고, 양자 인프라와 산업 활용 투자 확대를 유도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와 함께 ‘루미-Q(Lumi-Q)’ 컨소시엄도 가동 중이다. 이 프로젝트는 유럽 8개국 13개 기관이 참여해 기존 슈퍼컴퓨터와 초기 단계 양자 시스템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아키텍처’를 연구자들이 직접 시험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핀란드 에스포에 있는 CSC-IT 과학센터의 양자기술 책임자 미카엘 요한손은 유럽 이용자들이 양자 컴퓨팅을 실제로 테스트하며 미래 활용처를 찾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했다.
요한손은 양자 컴퓨터가 기존 컴퓨팅을 완전히 밀어내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다고 강조했다. 오히려 당분간은 슈퍼컴퓨터의 방대한 연산 능력이 필수이고, 그중 특히 복잡한 계산만 양자 컴퓨터에 넘겨 처리하는 구조가 현실적이라는 판단이다.
이는 업계 전반의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과거에는 양자 컴퓨터가 기존 시스템의 ‘차세대 대체재’처럼 묘사됐지만, 최근에는 특정 문제에서만 강점을 발휘하는 ‘전문화된 장비’로 보는 시각이 더 강해지고 있다. 즉 범용 컴퓨팅은 기존 시스템이 맡고, 양자 컴퓨팅은 고난도 계산을 보완하는 역할에 집중하는 방식이다.
현재 클라우드 사업자들이 초기 양자 하드웨어 접근성을 높이면서 연구 환경은 과거보다 나아졌다. 다만 시장의 더 큰 숙제는 ‘무엇에 쓸 수 있느냐’는 점이다. 양자 시스템은 0과 1의 비트가 아닌 양자 논리 기반으로 작동해, 일부 수학 문제를 기존 컴퓨터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풀 가능성이 있다.
특히 주목받는 분야는 소재 과학이다. 촉매, 배터리, 자석 같은 청정에너지 핵심 기술은 원자 단위 상호작용을 정밀하게 모델링해야 해 기존 컴퓨팅만으로는 부담이 크다. 반면 양자 컴퓨팅은 이런 문제 구조에 더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상용화 가능성이 거론되는 산업도 있다. 제약 분야에서는 분자 상호작용 분석을 고도화해 신약 개발 속도를 높일 수 있고, 금융권에서는 위험 분석과 포트폴리오 관리 같은 최적화 문제에 적용할 여지가 있다. 다만 요한손은 아직 대중적 보급 단계에 도달했다고 보기는 이르다고 선을 그었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특정 과제에서 기존 컴퓨터를 능가하는 ‘양자 우위’ 달성 경쟁이 빨라지고 있다. 요한손은 현재 업계가 실질적인 양자 우위 문턱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각국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기술 발전도 더 빨라질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다만 하드웨어 표준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현재 양자 컴퓨팅 시장에는 여러 방식의 기술 경로가 공존하고 있으며, 어느 하나가 확실한 승자로 굳어졌다고 보기 어렵다. 요한손 역시 단일 기술이 시장을 장악하기보다는 상당 기간 다양한 아키텍처가 병존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 점은 생성형 인공지능(AI) 확산 속도와도 다르다. 양자 컴퓨팅은 챗GPT 등장처럼 단번에 대중 시장을 뒤흔드는 순간보다, 하드웨어 성능 개선과 활용 사례 확대가 단계적으로 쌓이는 방식에 가까울 것이라는 설명이다.
CSC는 이런 전환을 앞당기기 위해 인공지능(AI), 고전 컴퓨팅, 양자 시스템을 통합하는 인프라 구축도 추진하고 있다. 연구자들이 세 기술을 함께 활용해 새로운 응용 사례를 찾도록 돕겠다는 전략이다.
양자 컴퓨팅은 아직 초기 시장이지만, EU처럼 정책과 인프라를 동시에 밀어붙이는 지역이 늘수록 기술 주도권 경쟁도 더 치열해질 전망이다. 결국 승부는 ‘누가 먼저 장비를 만들었느냐’보다 ‘누가 먼저 실제 쓸모를 입증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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