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업계에서 ‘판이 바뀌는’ 순간은 드물다. 그런데 지금의 인공지능(AI) 흐름은 단순한 기술 업그레이드가 아니라 기업 운영 전반을 다시 짜는 수준의 변화로 평가된다. 인프라와 애플리케이션은 물론 운영 방식, 의사결정 구조, 리더십까지 동시에 재편되고 있다는 뜻이다.
이 변화의 중심에 최고재무책임자(CFO)가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미국 뉴욕증권거래소(NYSE)에서 열린 IBM 주최 C-레벨 대담 시리즈 ‘더 트랜스포메이션 엣지’에서 짐 캐버노 IBM CFO는 이제 CFO가 단순히 숫자를 지키는 역할에 머물 수 없다고 강조했다. 과거처럼 재무건전성과 예측 가능성, 리스크 관리에만 초점을 맞추는 방식으로는 AI 시대의 기업가치를 제대로 만들어내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캐버노는 새로운 CFO 역할을 세 가지 축으로 제시했다. 첫째는 회사의 비전과 성장 방향을 다시 설계하는 일이다. 단순히 실적을 집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새로운 시장과 성장 기회를 발굴해야 한다는 의미다. 둘째는 사업모델 자체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자본 배분과 외부 생태계 참여를 비용 통제가 아닌 경쟁우위 확보 수단으로 봐야 한다는 얘기다. 셋째는 조직의 민첩성을 끌어올리는 역할이다. 기업 전반에서 빠른 실행이 가능하도록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중요해졌다는 설명이다.
결국 AI 시대 CFO는 성과를 ‘보고’하는 사람이 아니라 성장을 ‘만드는’ 사람으로 바뀌고 있다. 예산을 관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본을 전략적 무기로 써야 하며, 속도를 늦추는 내부 통제자보다 실행을 가능하게 하는 조정자로 움직여야 한다는 분석이다.
이 같은 변화의 배경에는 데이터와 AI의 결합이 있다. 기업의 데이터가 흩어져 있고 업무 흐름이 기계가 읽을 수 없는 구조라면 AI는 그 사업을 제대로 분석하거나 최적화할 수 없다. 그래서 많은 기업이 데이터를 중앙화하고, 업무 프로세스를 계측하며, 의사결정 구조를 ‘머신 리더블’ 형태로 바꾸는 데 속도를 내고 있다.
이는 전통적인 IT 현대화와는 결이 다르다. 단순히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회사가 움직이는 방식을 근본부터 다시 연결하는 작업에 가깝다. 이 과정에서 CFO는 전략과 데이터, 재무 성과를 하나의 실행 체계로 묶는 핵심 역할을 맡게 된다.
기사에 따르면 시장은 이제 ‘AI 플러스’ 단계에서 ‘플러스 AI’ 단계로 이동하고 있다. 기존 사업 위에 AI 기능을 덧붙이는 것을 넘어, 애초에 AI를 기본 전제로 기업을 설계하는 흐름이라는 뜻이다.
IBM은 이를 ‘팀십(teamship)’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사람은 판단과 현업 전문성을 제공하고, AI는 대규모 처리와 속도를 담당하며, 리더는 이 둘의 협업 체계를 설계해야 한다는 모델이다. 이 경우 CFO는 최고경영자(CEO)와 함께 기업 운영 체계를 공동 설계하는 위치에 가까워진다.
과거 자본 배분은 효율성 중심이었다. 한정된 자원을 얼마나 낭비 없이 쓰느냐가 핵심이었다. 하지만 AI 전환기에는 자본 배분의 의미가 달라진다. 생산성 향상으로 생긴 여력을 다시 성장과 혁신에 재투자하면 성과가 복리처럼 누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구조가 자리 잡으면 생산성 개선이 다시 투자 여력 확대로 이어지고, 그 투자 여력이 또 새로운 성장으로 연결되는 ‘선순환’이 만들어진다. AI가 단순한 비용 절감 도구에서 시장 창출 엔진으로 바뀌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대다수 기업은 여전히 AI를 비용 절감 관점에서 먼저 본다. 그러나 캐버노는 AI 가치의 약 20%만이 생산성 향상에서 나오고, 나머지 80%는 새로운 시장과 매출원에서 발생할 것이라고 짚었다. 기존 업무를 더 싸고 빠르게 처리하는 것보다, 이전에는 할 수 없었던 사업을 가능하게 만드는 쪽이 훨씬 큰 기회를 제공한다는 주장이다.
이 관점은 CFO 역할 확대와도 맞닿아 있다. 비용 절감만 따지는 조직에서는 CFO가 통제 중심 역할에 머물 수 있지만, 새로운 수익 구조를 설계해야 하는 환경에서는 CFO가 성장 전략의 핵심 인물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IBM은 이런 전략을 외부 고객보다 먼저 자사 내부에 적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른바 ‘클라이언트 제로’ 전략이다. IBM은 전 세계 175개국, 약 28만 명의 직원을 대상으로 다양한 업무 흐름과 기능에 AI를 먼저 심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시장에 솔루션을 내놓고 있다.
여기서 드러난 교훈은 분명하다. AI를 도입하는 일 자체는 상대적으로 쉽지만, 조직 전체로 확장해 실제 가치를 만들어내는 일은 훨씬 어렵다는 점이다. 많은 기업이 이 지점에서 막히고 있으며, 결국 차이를 만드는 것은 기술 자체보다 실행력이라는 분석이다.
AI 전환은 전략 차원에서 끝나지 않는다. 실제 일하는 방식과 조직 구조까지 깊게 바꾼다. IBM 사례에서는 현업 전문성, 기술, 리더십을 하나의 운영 모델로 묶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사람과 AI 시스템이 사후적으로 억지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함께 작동하도록 설계되는 방식이다.
캐버노는 이를 두고 “관리자는 통제하지만, 리더는 가능하게 한다”고 표현했다. AI 중심 기업에서 리더십은 감시와 승인보다 사람과 기계가 효율적으로 협력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에 가깝다. 팀이 더 빠르게 움직이고, 혁신이 반복적으로 쌓이도록 만드는 것이 리더의 핵심 과제가 된 셈이다.
이번 논의의 핵심은 AI가 또 하나의 기술 사이클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기업 내부의 권한 구조와 의사결정 중심축까지 바꾸는 ‘권력 이동’에 가깝다. CFO는 이제 재무 보고 담당자에서 실행 설계자로, 위험 회피의 상징에서 성장 설계자로 이동하고 있다.
AI 전환에 먼저 성공한 기업은 단순히 기술을 빨리 도입하는 데 그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실행 속도와 확장성, 성장성에서 경쟁사를 앞설 여지가 커진다. 반면 많은 기업은 여전히 과거의 규칙으로 현재의 변화를 관리하려 하고 있다. 시장은 이미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있는데, 조직 운영 방식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모습이다.
한편 이번 대담은 실리콘앵글과 더큐브의 행사 보도 일환으로 공개됐다. 기사에 포함된 영상 인터뷰는 해당 시리즈의 전체 내용을 담고 있으며, 더큐브는 유료 미디어 파트너로 참여했다. IBM 등 후원사는 편집권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매체 측은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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