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립토 시장에서 ‘영구선물(perps)’이 조용히 판을 바꾸고 있다. 전통 금융을 닮아가던 흐름과 달리, 이제는 전통 자산이 오히려 크립토가 만든 구조 위로 올라오는 모습이다.
영구선물은 만기와 결제일이 없는 대신 ‘펀딩비’로 현물 가격을 추종하는 파생상품이다. 한때는 비트코인(BTC), 이더리움(ETH) 같은 암호화폐에만 쓰이던 구조였지만, 지금은 금, 주요 통화, 주식, 지수까지 확장되고 있다. 시장 규모도 압도적이다. 하루 거래량은 최대 약 7500억 달러(약 1084조5000억 원)에 달하며, 현물 시장보다 몇 배 큰 흐름을 보이기도 한다.
이 변화는 최근 들어 더욱 뚜렷해졌다. 온체인 기반 플랫폼에서는 대형 기술주를 포함한 개별 주식의 ‘합성 영구선물’이 비트코인과 함께 거래되고 있으며, 중앙화 거래소 역시 원자재와 지수 상품으로 영구선물을 확대하고 있다.
코인데스크 리서치에 따르면 2026년 5월 기준 실물자산(RWA) 기반 영구선물 거래량은 2110억 달러(약 305조 원)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는 2025년 4분기 약 120억 달러 대비 약 16배 증가한 수치다. 특히 주식 영구선물은 한 달 만에 121% 급증하며 540억 달러 규모에 도달했다.
일부 분석가는 향후 주식 영구선물 시장이 암호화폐 영구선물 규모를 넘어설 가능성도 제기한다. 시장의 방향은 명확하다. 크립토가 전통 금융으로 수렴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 금융이 크립토의 구조를 채택하는 흐름이다.
확산 배경은 단순하다. 더 ‘편리하기’ 때문이다. 영구선물 시장은 24시간 연속 거래가 가능하고, 주말에도 멈추지 않는다. 공매도를 위해 별도 대차를 구할 필요도 없고, 만기 롤오버나 결제 대기 시간도 없다.
이는 금이나 대형주처럼 기존 시장에서 거래되던 자산에도 의미 있는 변화다. 기존 거래소와 달리 시간과 접근성 제약이 크게 줄어든다.
물론 비판도 존재한다. 영구선물은 레버리지 기반 투기 수단이라는 지적과, 펀딩비가 전통적인 가격 발견 기능을 완전히 대체할 수 없다는 우려다. 또 변동성이 큰 자산에 상시 레버리지를 허용하면 리스크가 집중될 수 있다는 문제도 있다.
다만 이는 구조가 사라질 이유가 아니라, 더 정교하게 설계되어야 할 과제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이미 수요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구조가 IPO 시장까지 스며들고 있다는 것이다. 2026년 6월 상장한 스페이스X는 상장 전 하이퍼리퀴드(Hyperliquid)에서 ‘프리IPO 영구선물’ 형태로 거래됐다. 5월 일평균 수천만 달러 규모에서 시작해, 상장 당일에는 약 13억 달러(약 1조8798억 원)까지 거래가 몰렸다.
전통 시장에서 물량을 배정받지 못한 투자자들이 크립토 인프라로 몰린 결과다. 이는 자본시장 접근 방식 자체가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현재 주요 거래소들은 주식, 암호화폐, 외환을 하나의 계정에서 동시에 거래할 수 있는 ‘멀티자산 시장’을 구축 중이다. 2026년 5월에는 단일 중앙화 거래소가 전체 실물자산 영구선물 거래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실제로 비트겟 이용자의 52%는 주식과 크립토를 함께 보유하고 있다.
이제 중요한 질문은 ‘크립토가 월가를 닮을 것인가’가 아니다. ‘월가가 얼마나 크립토 구조 위에서 거래될 것인가’다.
시장에서는 토큰화가 향후 글로벌 자본시장의 약 10%를 바꿀 것으로 본다. 이는 수조 달러 규모의 변화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영구선물이라는 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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