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암호화폐의 ‘리눅스 모멘트’, 이념의 종말과 실용의 승리

| 토큰포스트

인터넷 세상을 지탱하는 거대한 뿌리는 ‘리눅스(Linux)’다. 전 세계 서버의 대다수가 리눅스로 구동되고, 우리가 매일 쓰는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의 심장도 리눅스다. 그러나 정작 일반 사용자들은 자신이 리눅스를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 그저 인터넷이 빠르고, 앱이 잘 돌아가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지금 암호화폐 시장이 맞이한 변곡점이 바로 이 ‘리눅스의 길’이다. 지난 수년간 암호화폐 업계는 대중이 자신들의 가치를 따를 것이라 오판했다. 탈중앙화, 자기 주권 신원(Self-custody), 급진적인 투명성 같은 이념들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 가정은 틀렸다. 본지가 지난 사설을 통해 암호화폐 시장이 제도권으로 편입되는 과정의 진통과 초기 양상을 진단했듯, 결국 시장을 움직인 것은 거창한 이념이 아니었다. 대중이 선택한 것은 철저한 ‘실용주의’였다.

최근 기관과 주류 앱들이 암호화폐 레일을 도입하는 방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들은 암호화폐의 ‘문화’는 철저히 배제하고 ‘기술’만 취하고 있다. 이것은 암호화폐 지상주의자들에게는 불편한 진실일지 모르나, 산업적 측면에서는 불가피한 귀결이다.

이제 암호화폐는 문화로서가 아니라 인프라로서 주류에 진입하고 있다. 리눅스처럼 지루하고, 보이지 않으며, 브랜드가 없는 기저 기술로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스테이블코인이 결제망을 대체하고, 퍼블릭 블록체인이 가치 정산의 도구가 되며, 온체인 시스템이 송금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추고 있다. 하지만 사용자 95%는 자신이 ‘크립토’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들은 그저 더 싸고, 더 빠르고, 더 믿을 수 있는 결과를 원할 뿐이다. 이것이 진짜 혁신이다.

초기 시장을 선점한 기업들의 성공 요인은 그들이 ‘덜 암호화폐스럽게’ 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업계의 난해한 전문 용어를 걷어내고, 복잡한 지갑 생성 과정을 추상화했으며, 중앙화된 프론트엔드를 과감히 도입했다. 이념을 최적화한 것이 아니라, ‘유통’과 ‘사용성’을 최적화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 후드티를 입은 개발자들의 세상에서, 양복을 입은 금융의 시대인 이른바 ‘화이트칼라(White-collar)’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향후 10년, 암호화폐 시장의 패권은 새로운 원천 기술을 발명하는 자가 아니라, 이 기술을 기존 레거시 시스템에 얼마나 매끄럽게 연결하느냐에 달렸다.

구매자가 암호화폐의 철학을 믿지 않아도 상품을 구매하게 만드는 능력, 암호화폐의 언어를 비즈니스의 언어로 번역할 수 있는 능력이 승부를 가를 것이다.

시장은 더 이상 허황된 ‘하이프(Hype·과장된 기대)’에 보상하지 않는다. 대신 명확성, 포지셔닝, 그리고 실질적인 유통 능력에 보상한다. 리눅스가 그랬듯, 암호화폐도 대중의 눈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돌아갈 때 비로소 진정한 성공을 거둘 것이다. 화려한 구호가 사라진 그 자리, 바로 그곳에 암호화폐의 진짜 미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