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 렌(Olli Rehn) 핀란드 중앙은행 총재가 "통화정책은 석유를 더 생산할 수도, 해운 항로를 다시 열 수도, 지정학적 갈등을 해결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에너지 충격 속에서 중앙은행이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짚은 발언이다.
렌 총재는 14일 태국 방콕에서 열린 씨티 매크로 포럼(Citi Macro Forum) 모두발언에서 이같이 밝혔다. 연설문은 19일 국제결제은행(BIS) 홈페이지에 공개됐다. 렌 총재는 유럽이 지정학적 불안과 급격한 기술 변화라는 두 압력을 동시에 마주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9월 유로존 성장 전망을 상향했다. 렌 총재는 유로존 경제가 올해 1%를 약간 밑도는 성장을 하고, 이후 2년은 매년 1.5% 안팎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설명했다. 방위비 지출과 인프라 투자가 수요를 떠받치고, 소비자 신뢰도 점차 나아졌다는 것이다. AI(인공지능) 관련 활동도 투자와 디지털 서비스, 수출 실적에서 눈에 띄기 시작했다고 했다.
불확실성은 여전하다. 렌 총재는 중동 분쟁과 변동성 큰 에너지 가격이 유럽 경제의 회복력을 당연하게 여길 수 없게 한다면서도, 기업과 가계가 적응 능력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핀란드의 성장 전망은 이전 예측보다 크게 개선됐다. 올해 성장은 수출이 이끌었고, 데이터센터 붐이 새 투자를 끌어들이며 청정 전력과 디지털 인프라 수요를 키웠다. 핀란드의 전력 생산은 현재 96%가 화석연료를 쓰지 않는다.
AI에 대해서는 기회와 위험을 함께 언급했다. 데이터센터, 컴퓨팅 파워, 소프트웨어, 디지털 인프라, 인력 양성에 대한 대규모 투자가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되고 있다는 평가다. 렌 총재는 유럽에서 핵심은 누가 기술을 발명하느냐가 아니라 기업과 산업 전반에서 누가 이를 널리, 생산적으로 쓰느냐라고 강조했다. 유럽은 과학 지식과 기술 역량은 강했지만 혁신을 확산하는 데는 상대적으로 약했다고도 짚었다. 반면 급격한 혁신은 자본 배분의 왜곡, 가치평가 조정, 금융시장 변동성으로 이어질 수 있어 신중한 관리가 필요하지만, 근본적인 기술 변화는 계속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물가에 대해서는 유로존 물가 상승률이 목표를 웃돌고 있으며 주된 원인은 에너지 가격 상승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임금 상승세는 완만하고 2차 파급효과도 지금까지는 제한적이어서 물가 압력이 광범위하지는 않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상방 위험은 커졌다며 물가 안정에 대한 꾸준한 의지와 경계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렌 총재는 중앙은행의 역할을 이렇게 정리했다. 통화정책이 지정학적 갈등을 해결할 수는 없지만, 일시적 충격이 인플레이션 기대와 임금 결정 행태에 고착되지 않도록 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지난 수십 년 쌓인 중앙은행의 신뢰는 가장 값진 공공 자산 중 하나라고 했다.
기대 관리의 중요성은 미국에서도 거론됐다. 크리스토퍼 월러(Christopher J. Waller)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이사는 지난 7월 연설에서 금리 수준만으로는 통화정책의 효과를 판단하기 어렵고 시장 기대가 전달 경로를 바꾼다고 밝혔다.
렌 총재는 경기 전망에서 구조 과제로 넘어가며 유럽이 치러야 할 세 가지 시험을 제시했다. △안보 △에너지 회복력 △생산성 성장이다. 안보에서는 유럽이 자체 방위에 더 큰 책임을 지고 안보 관련 투자와 조달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에너지에서는 경쟁력 있고 지속 가능하며 외부 충격에 덜 취약한 체계가, 생산성에서는 혁신 강화, 자본시장 심화, 인적 자본 투자, 창업과 기술 확산을 막는 불필요한 장벽 제거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통화정책만으로는 이런 과제를 풀 수 없지만 해법이 설 안정적 토대는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불확실성 속에서 ECB의 역할은 '안정된 손'이 되는 것이라고도 했다.
렌 총재는 연설을 이렇게 맺었다. "지정학적 힘의 정치는 유럽의 회복력을 시험하고 있고, 인공지능은 유럽의 혁신과 적응 능력을 시험하고 있다. 통합과 투자, 건전한 정책으로 대응하면 유럽은 이 시험의 시기를 재도약과 번영의 10년으로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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