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한국만 스테이블코인이 금기어인가

| 토큰포스트

국내 최초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BDACS가 아발란체(Avalanche) 블록체인에 올린 ‘KRW1’이다. 우리은행 예치금으로 1:1 담보를 약속하는 구조다. 발행·검증·거래 관리, 실시간 예치금 확인까지 가능한 기술적 토대를 갖췄다. 공공 결제와 정산의 인프라로 확장될 잠재력도 분명하다. 다시 말해, 실무적으로는 흠잡을 데가 거의 없는 ‘현실적 혁신’이다.

그럼에도 첫걸음은 부끄럽게도 뒷걸음이었다. 보도자료에는 분명 우리은행의 이름이 들어갔다. 그런데 기사가 나간 직후 본지에 연락이 와 은행 이름을 빼달라고 했다. 이름을 감춘 이유를 본지가 확인한 바는 없다. 다만 필자의 추측을 말하자면, 은행과 금융권이 규제·정책의 눈치를 보며 즉각적인 ‘공개 협력’을 주저한 것이다. 스테이블코인이라는 단어 자체가 우리 금융권에서는 여전히 금기어다. ‘해도 되는 것’과 ‘보여줄 수 있는 것’ 사이에서 관(官)과 기관(機關)이 내리는 나약한 계산이 한 장면으로 드러난 것이다.

여기엔 국회와 정부의 책임도 크다. 금융위원장 후보 이억원 씨는 최근 청문회에서 스테이블코인에 대해 “안전장치 마련”이라는 모호한 말을 반복했다. 발행 주체와 인가 기준을 묻는 질문에는 “단언하기 어렵다” “고민 중”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규제의 존재 이유를 소비자 보호에서 찾는 것은 옳다. 그러나 소비자 보호를 구실로 무작정 발목을 잡는 것은 직무유기다. 기준을 빨리 내놓고, 허용과 금지의 경계를 명확히 하라. 말로만 ‘신중’을 외치는 동안 혁신은 해외로 달아난다.

해외는 이미 속도를 냈다. 미국은 연방 차원의 스테이블코인 법을 통과시켜 발행 주체·준비금·AML 의무를 규정했다. 홍콩은 조례로 발행자 요건과 환매 의무를 강제했다. 일본은 지급서비스법 개정으로 엔화 스테이블코인 실증이 가시화됐다. 빅테크는 이미 결제 인프라 단계에서 스테이블코인을 표준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구글의 AP2 같은 프로토콜은 AI가 스테이블코인으로 결제하는 미래를 미리 설계한다. 요컨대 세계는 스테이블코인을 ‘규제와 함께’ 수용하고, 제도를 통해 시장을 끌어안는다.

그런데 한국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규제를 이유로 공개 협력의 최소한의 용기를 상실한 은행, 책임을 회피하는 규제당국, 그리고 침묵하는 정치권이 공통의 죄인이다. 혁신 기업이 공들여 만든 인프라에서 은행 이름만 빠지게 하는 행동은 단순한 꼼수나 위장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 금융의 국제적 수치’다. 이름을 감추는 은행의 모습에서 우리는 글로벌 경쟁력의 상실을 본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관성이다. 규제를 마련해야 한다면, 규제의 속도와 명확성으로 시장을 보호하고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태도는 ‘모든 위험을 제로로 만들자’는 무책임한 완벽주의다. 완벽한 안전장치 따위는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규제가 지나치면 산업은 죽고, 너무 느리면 외국에 주도권을 빼앗긴다. 균형을 잡을 능력이 관료와 정치권에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다음 주 열리는 ‘코리아 블록체인 위크’(Korea Blockchain Week)는 한국의 진면목을 가늠할 시험대다. BDACS와 우리은행은 공식 파트너로 무대에 올라선다. 본지는 이 행사에서 좌장을 맡아 두 개의 패널을 진행한다. 공개 토론이 벌어질 것이다. 부디 그 자리가 단순한 쇼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공개 토론에서 당국은 답을 내놓아야 한다. 은행은 더 이상 이름을 숨기지 말라. 산업계는 규제의 구체적 틀을 요구하라. 언론은 소극적 중재자가 될 것이 아니라, 묻고 추궁해야 한다.

정리하자. 규제는 혁신의 족쇄가 아니다. 산업을 보호하고 질서를 만드는 보호막이다. 그러나 보호막은 속도와 현실을 반영해 설계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두려움에 숨고, 이름을 지우는 풍토가 지속되면 한국은 세계 디지털 금융 지도에서 스스로 자리를 잃을 것이다. 이름을 지키고, 제도를 만들고, 시장을 선도하라. 그것이 국가 경쟁력이다. 만약 국회가 끝내 방향을 내놓지 못한다면 이는 직무유기이며, 당국의 관료주의적 책임회피는 곧 한국 금융을 국제무대에서 고립시키는 자해 행위에 다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