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큰포스트 리서치센터는 《2024–2025 주요 블록체인별 스테이블코인 생태계 분석 보고서》를 통해 스테이블코인 시장의 주 무대가 ‘거래소’에서 ‘체인’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본 기사는 해당 보고서의 핵심 내용을 토대로, 각 체인의 기술적 전략과 거버넌스 경쟁 구도를 분석한다. [편집자 주]
스테이블코인 시장의 지형이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이전까지는 거래소, 메인넷, 혹은 디파이 (DeFi) 프로토콜이 경쟁의 중심이었다면, 이제 그 무대는 ‘스테이블코인 체인(stablecoin chain)’으로 이동했다. 겉으로는 더 빠르고 저렴한 결제 네트워크 경쟁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누가 이 시스템의 규칙을 정할 것인가, 다시 말해 ‘통제권’을 둘러싼 주권 경쟁이 숨어 있다.
최근 몇 달 사이, 스테이블코인 친화형 블록체인을 표방하는 신생 체인들이 속속 등장했다. 유럽 기반의 Gnosis, 초고속 결제 인프라를 내세운 Plasma, 인공지능(AI) 융합형 금융 시스템을 개발 중인 Neura, 그리고 아직 출시 전 단계임에도 업계의 관심을 끌고 있는 Arc와 Tempo가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모두 기존 메인넷의 한계를 보완하며, 스테이블코인 중심의 효율적 생태계를 구현하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 흐름의 본질은 단순한 기술적 진화가 아니라 누가 체인의 룰을 통제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더리움의 ‘중력’을 넘어서기 어려운 현실
이론적으로는 다양한 신규 체인이 생태계를 분산시킬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훨씬 냉정하다. 현재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유통량의 대부분은 여전히 이더리움(Ethereum) 네트워크 위에 머물러 있다. USDT, USDC, DAI, USDe 등 주요 스테이블코인의 발행과 거래가 집중되어 있고, 디파이(DeFi) 거래량 또한 이더리움에 의존한다.
이더리움은 사실상 블록체인의 ‘기축통화 시스템’으로 작동하고 있다. 따라서 어떤 신규 체인이라도 이더리움이 지닌 유동성과 네트워크 효과, 즉 ‘중력(gravity)’을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흥 체인들은 각기 다른 전략을 통해 이 거대한 중심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하고 있다. 그들의 목표는 단순히 기술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체적인 거버넌스 권력을 확보하는 데 있다.
신흥 체인들의 전략 — 효율성, 집중, 그리고 위험
새로운 체인들의 전략은 표면적으로 ‘효율성’에 초점을 맞춘다. Arc는 규제 친화적 결제 인프라를, Plasma는 초고속 송금 기능을, Neura는 AI와 결합한 데이터 금융을, Tempo는 특정 발행사를 중심으로 한 맞춤형 결제 시스템을 실험 중이다.
하지만 최근 보도한 바에 따르면, 이러한 체인들 대부분은 발행사 중심의 통제형 구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사가 직접 체인의 설계 과정에 참여하거나, 주요 검증 노드를 운영하면서 정책을 결정한다. 이 경우 거래 속도와 비용 측면에서 효율성은 높아질 수 있지만, 체인의 거버넌스는 특정 발행사에 집중된다. 결국 블록체인의 핵심 가치인 ‘탈중앙성’과는 거리가 먼 구조다.
예컨대 Arc는 USDC 발행사인 서클(Circle)과의 긴밀한 기술 연계를 내세운다. Plasma는 테더(USDT) 중심의 네트워크 유동성을 구축하려 한다. 이러한 구조는 개별 발행사에게는 효율적이지만, 다른 스테이블코인 발행자나 독립 개발자에게는 진입 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다. 결국 빠른 속도와 낮은 수수료 뒤에는 ‘권력 집중’이라는 리스크가 숨어 있다.
만약 한 발행사가 네트워크 정책을 단독으로 바꾸거나 특정 이용자를 차단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실상 디지털 중앙은행의 출현과 다를 바 없다. 블록체인이 처음 내세운 ‘모두를 위한 개방형 금융 시스템’이라는 이상이 위태로워지는 순간이다.
개방형 접근 — Gnosis의 다른 길
이에 대한 대조적인 접근은 Gnosis에서 볼 수 있다. Blockworks에 따르면 Gnosis는 특정 발행사에 의존하지 않고, 여러 종류의 스테이블코인과 지역 통화를 함께 수용하는 개방형 모델을 지향한다. Gnosis의 핵심 철학은 간단하다. “어떤 발행사도 체인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 이 체인은 복수의 스테이블코인이 공존할 수 있는 구조를 설계하며, 유로(EUR), 페소(PESO), 리라(LIRA) 등 비(非)달러 기반 자산까지 통합하려는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개방형 모델 역시 쉽지 않은 길이다. 유동성을 빠르게 모으기 어렵고, 수익 모델이 불투명하며, 비달러 스테이블코인의 실사용 수요가 아직 제한적이다. 결국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Gnosis는 “거래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거버넌스의 중립성”이라는 메시지를 일관되게 던지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의 시대에 진정한 신뢰를 얻는 체인은, 기술보다 원칙 위에 세워진 시스템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전통 금융의 반격 — Swift의 블록체인 진입
이런 가운데 전통 금융권의 대표 주자 Swift가 새로운 변수를 던졌다. 최근 Swift가 자체 블록체인 인프라 구축 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이는 스테이블코인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는 결제 시장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적 행보다.
Swift는 전 세계 1만 1,500여 금융기관을 연결하는 글로벌 결제 네트워크로,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뱅크오브아메리카(Bank of America), 씨티그룹(Citigroup), 내트웨스트(NatWest) 등 주요 은행들과 협력하고 있다. 또한 이더리움 공동창업자 조셉 루빈이 이끄는 콘센시스(Consensys)와 함께, 토큰화된 자산과 스테이블코인 결제를 위한 분산원장 시스템을 개발 중이다.
이 시스템은 거래를 블록체인 상에서 실시간으로 기록·검증하며, 스마트컨트랙트를 통해 규칙을 자동으로 집행한다. Swift는 이를 통해 “24시간 즉시 결제가 가능한 글로벌 결제 인프라”를 목표로 한다. 이는 곧 스테이블코인 생태계에 대한 제도권의 반격이다.
맥킨지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스테이블코인 시장 규모는 약 3,000억 달러에 이르며, 기존 국제 송금망인 Swift의 결제 속도(최대 5일)를 압도한다. Swift의 블록체인 진입은 이 격차를 좁히고, 기존 금융 질서를 블록체인 구조로 옮겨오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누가 통제하느냐’
결국 스테이블코인 체인 경쟁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 구조의 문제다. 누가 체인을 관리하고, 누가 참여를 허락하며, 누가 규칙을 바꿀 수 있는가 — 그 질문이 시장의 신뢰를 결정한다. 하나의 발행사나 특정 기업이 체인을 지배하는 순간, 블록체인 산업은 다시 금융 집중 구조로 회귀하게 된다. 이는 탈중앙화라는 혁신의 본질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스테이블코인은 이미 글로벌 결제 인프라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았다. 이 시장을 누가 지배하느냐는 단순히 코인의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의 디지털 금융 질서를 누가 설계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다.
이제 시장은 선택해야 한다. 편리하지만 폐쇄적인 체인을 택할 것인가, 혹은 불편하지만 개방적인 시스템을 지켜낼 것인가. 기술의 발전이 권력 집중으로 귀결된다면, 블록체인의 혁명은 완성되지 못한다.
스테이블코인 체인 경쟁의 진짜 승자는 속도나 비용이 아닌 ‘원칙’ 위에 선 쪽이 될 것이다. 그 원칙은 명확하다. 누구도 시장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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