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블코인 시장이 3,210억 달러 규모로 성장하며 사상 최대치를 경신하는 동안, 시장 대부분이 외면해온 질문이 하나 있다. 대규모 상환 요청이 한꺼번에 몰려오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국제결제은행(BIS)이 이달 발표한 워킹페이퍼 '스테이블코인을 더 안정적으로 만들기: 규제가 도울 수 있는가(Making Stablecoins Stable(r): Can Regulation Help?)'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한 정량적 해부다. 결론부터 말하면, 규제가 없는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는 구조적으로 위기에 취약하며, 그 위기는 더 이상 크립토 시장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 단기금융시장 전체로 전이되는 금융안정의 문제다.
■ 현금 12%, 자본 0.1%… 숫자가 말하는 구조적 취약성
BIS 연구진(티루팜 고엘, 울프 레브릭, 이샤 아가왈)이 주요 발행사의 공시 데이터로 모형을 보정한 결과는 직관적이면서도 충격적이다. 대표 발행사의 준비자산 중 현금성 자산은 약 12%에 불과하고, 나머지 88%는 단기 미 국채 등 이자수익 자산에 투자돼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자본비율이다. 발행 스테이블코인 대비 자본은 약 0.1% 수준이다. 은행의 자기자본비율이 두 자릿수 퍼센트로 관리되는 것과 비교하면 사실상 '자본 없는 금융기관'에 가깝다.
이 구조는 평시에는 합리적이다. 현금은 이자를 낳지 않고, 단기 국채는 안전하면서도 수익을 준다. 문제는 상환이 몰릴 때다. 현금 버퍼가 바닥나면 발행사는 국채를 헐값에 팔아야 하고(파이어세일), 매각 손실은 0.1%짜리 얇은 자본을 순식간에 잠식한다. BIS 모형에 따르면 규제가 없는 경우 스트레스 상황(2 표준편차 수준의 상환 충격)에서 발행사의 주간 부도확률은 15bp를 넘는다. 자본이 마이너스로 떨어지는 순간, 코인 보유자는 1달러를 돌려받지 못한다.
■ 크립토 문제가 아니라 국채시장 문제다
이 보고서의 진짜 경고는 전이 효과에 있다. BIS는 발행사의 강제 국채 매각이 3개월물 미 국채 수익률에 미치는 영향을 추정했다. 100억 달러 규모의 강제 매각은 주간 수익률을 약 2.9bp, 300억 달러 매각은 약 6.4bp 끌어내린다. 단기국채 시장의 가격 변동성이 통상 bp 단위로 움직인다는 점을 고려하면 결코 작은 충격이 아니다.
근거는 명확하다. 양대 발행사의 단기 국채 보유 규모는 이미 미국의 주요 국채 머니마켓펀드(MMF)에 필적하며, 테더는 단기 미 국채 최대 보유 주체 중 하나로 올라섰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들의 미 단기국채(T-bill) 보유액은 약 1,550억 달러에 달한다. 스테이블코인이 흔들리면 미국 단기자금시장이 함께 흔들리는 구조가 이미 완성된 것이다. 2023년 3월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 당시 USDC에서 벌어진 대규모 이탈은 이 시나리오의 예고편이었다.
■ '깨뜨릴 수 있는 버퍼'라는 발상의 전환
해법에 대한 BIS의 접근은 기존 규제 상식을 뒤집는다. 핵심 개념은 '사용 가능한 버퍼(usable buffer)'다. 보고서는 유동성비율(LR)과 자본비율(CR) 두 가지 규제 기준선을 제시하되, 이를 절대 깨면 안 되는 최저선(하드 미니멈)이 아니라 위기 시 일시적으로 하회할 수 있는 기준점으로 설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환이 몰려올 때 쓸 수 없는 현금 버퍼는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보고서의 시뮬레이션에서 유동성 기준을 경직된 최저 요건으로 강제하자 발행사가 현금 대신 채권을 즉시 팔 수밖에 없게 되면서 부도확률이 오히려 상승했다. 규제가 위기를 키우는 역설이다.
대신 기준선을 하회하면 코인 보유자들의 추가 상환, 즉 '코인홀더 규율'이 작동하도록 공시와 연동시키면, 발행사는 평시에 자발적으로 버퍼를 쌓고 위기 시에는 그 버퍼를 실제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두 기준의 작동 경로도 비대칭적이다. 유동성 기준은 현금 보유만 늘리지만, 자본 기준은 자본과 현금을 동시에 늘린다. 따라서 부도위험(미시건전성)과 시장충격(거시건전성)을 동시에 잡으려면 두 수단을 함께 써야 한다는 것이 결론이다. 수치로는, 유동성 기준 5%와 자본 기준 0.125%라는 비교적 낮은 수준의 조합만으로도 스트레스 상황의 주간 부도확률이 15bp에서 0.7bp로, 국채시장 충격은 4bp에서 2.7bp로 떨어진다.
■ 원화 스테이블코인 설계, BIS가 답안지를 줬다
이 보고서가 한국에 던지는 함의는 각별하다. 디지털자산기본법 2단계 입법, 즉 스테이블코인 규제는 2026년으로 미뤄진 상태이며, 한국은행은 안정성을 위해 발행사 지분의 과반을 은행이 보유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금융위원회는 이를 민간 기술기업에 대한 진입장벽으로 보고 반대하고 있다. 지금 한국의 논쟁이 '누가 발행하느냐'라는 지배구조에 머물러 있는 동안, BIS는 '얼마를, 어떻게 쌓게 할 것이냐'라는 계량적 설계의 답안지를 내놓은 셈이다.
BIS 프레임워크의 백미는 규제 수단과 정책 목표 사이의 양방향 매핑이다. 규제당국이 허용 가능한 부도확률과 시장충격 수준을 먼저 정하면, 그에 필요한 유동성·자본 기준 조합이 역산된다. EU의 미카(MiCAR)가 준비금의 30% 은행예치를 요구하고 미국 지니어스법(GENIUS Act)이 세부 기준을 시행 과정에서 채워가는 것처럼, 원화 스테이블코인 입법도 이제 '기준선 숫자'를 데이터로 정당화해야 하는 단계에 와 있다. 은행 지분율 논쟁으로 1년을 더 소모하기보다, 준비자산의 현금 비중과 자본 요건, 그리고 위기 시 버퍼 사용 메커니즘을 어떻게 설계할지로 논의의 축을 옮겨야 한다.
스테이블코인의 다음 승자는 가장 많이 발행하는 회사가 아니라, 상환이 가속화되는 순간에도 유동성과 신뢰를 지켜내는 회사가 될 것이다. 금융에서 안정성은 마케팅 문구가 아니라 인프라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인프라의 설계도는, 이번에 BIS가 절반쯤 그려서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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