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나흘간의 방한 일정을 마무리하는 8일, 서울 종로 SK서린빌딩에서는 가벼운 술자리 회동과는 결이 다른 장면이 펼쳐졌다. 황 CEO와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차세대 인공지능(AI) 메모리 공동개발과 AI 인프라 구축을 골자로 한 '장기 파트너십'을 공식 발표했다. 황 CEO는 이 자리에서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의 가장 큰 메모리 파트너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못 박았다.
홍대 앞 삼겹살집의 '삼쏘(삼겹살+소맥)' 회동, 잠실야구장 시구, PC방 깜짝 방문으로 채워진 그의 동선은 분명 화려한 쇼맨십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이번 방한은 엔비디아가 그리는 미래 가치사슬(Value Chain)의 좌표 위에 '한국'이라는 핵심 좌표를 한 번 더 깊게 찍는 정밀한 비즈니스 행보였다. 황 CEO는 한국을 단순한 고객이나 부품 공급처가 아니라, 자사 생태계를 구성하는 '복합 산업 클러스터'로 바라보고 있다.
왜 지금인가 — '포스트 모바일' AI 인프라의 2차 사이클
챗GPT가 촉발한 거대언어모델(LLM) 열풍은 1차 사이클이었다. 시장의 관심은 이제 단순한 칩 판매를 넘어 '종합 인프라와 공급망 안정성'으로 옮겨가고 있다. 황 CEO 스스로 이번 방한의 목적을 "공급망을 조율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힌 대목이 그 방증이다. 그는 "올해 하반기는 상반기보다, 내년은 올해보다 훨씬 더 큰 규모가 될 것"이라며 폭발적인 인프라 투자 사이클의 초입에 서 있음을 분명히 했다.
문제는 엔비디아의 구조적 약점, 즉 공급망 리스크다. 첨단 AI 칩의 위탁생산과 핵심 패키징(CoWoS) 공정을 사실상 대만 TSMC 한 곳에 의존하는 구조는 지정학적 시한폭탄에 가깝다. 이 리스크를 분산(Risk Hedging)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대체 거점이 한국이다. 메모리(HBM)는 물론, 파운드리와 제조 인프라까지 갖춘 산업 생태계를 보유한 나라는 많지 않다.
여기에 패러다임의 시프트가 겹쳤다. AI가 모니터 밖으로 나와 공장과 로봇, 자동차로 침투하는 '피지컬 AI(Physical AI)' 시대가 열린 것이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동시에 맞물려야 하는 이 영역에서, 한국의 중공업·제조업 자산은 단숨에 전략적 가치를 인정받게 됐다. 황 CEO가 이번 방한 내내 "피지컬 AI"를 입에 달고 다닌 이유다.
팩트 ① — 'PC방의 추억', 동맹의 역사적 뿌리
황 CEO가 한국에 보이는 각별한 애정에는 역사적 맥락이 있다. 2000년대 초반 한국의 PC방은 전 세계에서 엔비디아 그래픽카드(GeForce)를 가장 가혹하게 굴리던 '내구성 테스트베드'였다. 24시간 쉴 새 없이 돌아가던 수만 대의 PC방 그래픽카드가 엔비디아 제품의 신뢰성을 증명한 무대였던 셈이다.
이번 방한에서 그가 서초구의 한 PC방을 깜짝 방문해 이용객들에게 사인을 해준 장면은 우연이 아니다. 황 CEO는 방한 직전 대만에서도 "한국은 e스포츠와 게임, PC방 문화의 발상지로 지포스 초기부터 특별한 곳이었다"고 말했다. 게임과 e스포츠라는 소프트파워로 엔비디아 브랜드를 키워준 시장에 대한, 계산된 '예우'에 가깝다.
팩트 ② — 병목을 푸는 열쇠, SK하이닉스와 삼성
이번 방한의 가장 묵직한 성과는 메모리 공급망에서 나왔다. 황 CEO는 SK와의 공동 기자회견에서 "베라 루빈 AI 슈퍼컴퓨터, 베라 CPU, RTX 스파크, 젯슨 토르 등 엔비디아의 모든 신제품에 SK하이닉스 메모리가 적용된다"고 밝혔다. 기존의 HBM 단순 공급 관계를 넘어, 양사가 함께 로드맵을 설계하는 '장기 공동개발' 단계로 격상된 것이다.
협력의 범위도 메모리에 그치지 않는다. SK텔레콤은 엔비디아 클라우드 파트너(NCP)로 참여해 엔비디아 DSX 플랫폼 기반 AI 클라우드를 2027년 가동을 목표로 구축하고, 이후 기가와트(GW)급으로 확대해 아시아 시장까지 노린다.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의 쿠다-X(CUDA-X)와 옴니버스(Omniverse)를 활용해 반도체 공정 시뮬레이션과 공장 디지털 트윈을 고도화한다. 칩을 사고파는 관계가, 설계·제조·인프라 전반을 엮는 동맹으로 진화한 것이다.
삼성전자의 전략적 가치는 결이 조금 다르다. 메모리와 파운드리를 모두 보유한 유일한 기업이라는 점에서, 삼성은 엔비디아가 TSMC에 대한 협상력을 높이고 공급망을 다변화할 수 있는 최고의 '레버리지'다. 실제로 황 CEO는 차세대 메모리 HBM4와 관련해 "세 개 공급업체(삼성·SK하이닉스·마이크론) 모두 인증을 완료하고 양산에 들어갔다"며 이들이 차세대 '베라 루빈' 플랫폼 공급을 두고 경쟁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공급사 간 경쟁 구도를 활용해 가격 협상력과 공급 안정성을 동시에 확보하려는 노련한 포석이다. 이번엔 일정 문제로 이재용 회장과의 회동이 불발됐지만, 황 CEO가 "불과 몇 주 전 캘리포니아에서 만나 좋은 저녁을 함께했다"고 언급한 데서 양사 관계의 밀도를 짐작할 수 있다.
팩트 ③ — 피지컬 AI로 가는 길, 현대차·LG·네이버
엔비디아의 시선은 이미 메모리 너머 '피지컬 AI'를 향해 있다. 8일 오후 현대차그룹 양재 사옥을 찾은 황 CEO는 정의선 회장이 직접 안내하는 계열사 로봇 3종을 둘러본 뒤 "현대차그룹은 모빌리티 분야의 거인", "지금이 바로 현대차의 시대"라고 추켜세웠다. 자율주행과 로보틱스 제조 역량을 모두 갖춘 현대차그룹은 엔비디아 로보틱스 플랫폼이 실증될 거대한 무대다. 정 회장과 황 CEO는 지난해 10월 이후 1년 새 네 차례나 얼굴을 맞댔고, 현대차 AVP본부를 이끄는 박민우 사장은 엔비디아 출신으로 황 CEO와 직접 소통해온 핵심 인물이다.
LG그룹은 전장 부품과 가전, 스마트팩토리를 아우르며 피지컬 AI를 실제 산업 현장에 빠르게 이식할 제조망을 제공한다. 네이버는 또 다른 축이다. 이해진 의장이 이끄는 네이버클라우드는 '소버린 AI(Sovereign AI)'와 클라우드를 무기로, 엔비디아가 아시아·비영어권 시장을 확대하기 위한 소프트웨어 전초기지 역할을 맡는다. 반도체(SK·삼성)에서 시작해 로봇·모빌리티(현대차·LG), 소프트웨어(네이버)로 이어지는 사슬은, 한국을 엔비디아 생태계의 축소판으로 재구성한다.
'K-젠슨'이라는 코드 — 쇼맨십이 아니라 전략이다
"K-젠슨이라 불러달라"는 그의 너스레, 그리고 방한 때마다 반복되는 치킨·소주·삼겹살 회동을 단순한 친화력으로만 읽으면 본질을 놓친다. 황 CEO는 한국 대기업 특유의 '오너 중심 빠른 의사결정(Fast-track)' 문화를 정확히 꿰뚫고 있다.
미국식 위원회 의사결정 구조와 달리, 한국은 총수의 결단 한 번으로 조 단위 투자가 움직인다. 황 CEO가 최태원·정의선·구광모·이해진 등 총수들과 굳이 식탁에 마주 앉아 정서적 친밀감을 쌓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무 협상 100번보다 총수와의 저녁 식사 한 번이 더 큰 계약을 빠르게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삼쏘'와 '깐부치킨'은 친목이 아니라, 톱다운(Top-down) 의사결정 구조를 겨냥한 정밀 타격인 셈이다.
우리가 취할 것은 자만이 아닌 실익(實益)
젠슨 황은 한국의 가치를 120% 꿰뚫어 보고 정중하게 구애하는, 대단히 세련된 비즈니스 전략가다. 그가 한국 기업의 제조·소프트웨어 인프라를 엔비디아 중심의 가치사슬로 흡수하려 한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의 찬사에 취할 것은 자만심이 아니라 실익이어야 한다. 황 CEO는 8일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제조 역량과 AI 생태계를 갖췄지만, 인프라는 아직 많지 않다"며 "반도체에 팹(Fab)이 필요했듯 AI에는 공장(Factory)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기회이자 숙제다.
핵심은 체급을 올리는 일이다. HBM과 로봇, 클라우드를 '공급'하는 하청의 자리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엔비디아 생태계를 함께 그리는 '공동 설계자(Co-architect)'로 올라설 것인가. 황 CEO가 "서울이 원한다면 기꺼이 서울에서 GTC를 열겠다"고 한 발언을 단순한 덕담으로 흘려들어선 안 된다. 그 무대의 주인이 될 것이냐, 손님으로 남을 것이냐. 'K-젠슨'이 던진 진짜 질문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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