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큰화 경제의 다음 수요처는 사람이 아닐 수 있다. 인공지능(AI) 에이전트다.
IBM 기업가치연구소(IBV)가 발간한 『토큰화 경제의 은행업』 보고서에서 가장 미래지향적인 대목은 스테이블코인도, 디지털 커스터디도 아니다. 에이전틱 AI와 토큰화가 만나는 지점이다.
보고서는 AI와 토큰화를 별개의 기술 흐름으로 봐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두 기술은 따로 움직이는 혁신이 아니라 서로를 강화하는 인프라라는 것이다. AI가 금융 업무를 자율적으로 수행하려면, 자산과 정산 시스템 역시 기계가 읽고 실행할 수 있는 형태로 바뀌어야 한다. 그 조건을 만드는 것이 토큰화다.
IBM의 결론은 분명하다. 에이전틱 AI가 금융의 실무자로 진화할수록, 그 AI가 움직일 수 있는 프로그래머블 금융 레일이 필요하다. 토큰화는 그 레일이다.
AI가 금융을 움직이려면, 돈도 기계가 읽어야 한다
에이전틱 AI는 단순한 챗봇이 아니다. 사람의 지시를 기다리는 보조 도구가 아니라, 목표를 이해하고, 판단하고, 실행하는 자율 시스템이다. 금융 영역으로 오면 의미는 더 커진다. 대출 심사, 리스크 평가, 결제, 정산, 포트폴리오 조정, 공급망 금융, 기업 자금 운용까지 AI가 직접 처리하는 구조가 가능해진다.
그러나 여기에는 전제가 있다. AI가 금융 업무를 실제로 수행하려면 금융 인프라가 AI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 사람이 서류를 확인하고, 내부 결재를 올리고, 은행 영업시간에 맞춰 송금하고, 여러 중개기관을 거쳐 정산하는 구조에서는 AI의 자율성이 제한된다.
IBM은 이 문제를 토큰화가 풀 수 있다고 본다. 자산이 토큰화되면 소유권, 조건, 권리, 정산 규칙이 디지털 코드로 표현된다. AI 에이전트는 이 정보를 직접 읽고, 정해진 조건에 따라 거래를 실행하며, 스마트컨트랙트를 통해 정산까지 처리할 수 있다.
보고서는 에이전틱 AI가 금융 워크플로를 완전 자율로 운영하기 시작하면, 이를 대규모로 수행하기 위해 프로그래머블한 토큰화 레일을 요구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쉽게 말해 AI가 금융의 운전자가 되는 순간, 기존 도로가 아니라 기계가 달릴 수 있는 새 도로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AI와 토큰화가 만나는 네 가지 접점
IBM은 에이전틱 AI와 토큰화가 결합할 때 나타나는 효과를 네 가지로 정리했다. 인센티브, 효율, 보안, 상거래다.
첫째는 수익화와 인센티브 정렬이다. AI 에이전트의 활동, 산출물, 상호작용을 토큰으로 표현하면 성과 기반 경제 모델을 만들 수 있다. 에이전트가 특정 작업을 수행하고 보상을 받거나, 여러 에이전트가 협업해 가치를 만들고 이를 토큰으로 배분하는 구조가 가능해진다.
이는 기존 플랫폼 경제와 다르다. 지금까지는 사람이 플랫폼에 참여하고 보상을 받았다면, 앞으로는 AI 에이전트가 네트워크에 참여하고 보상을 받을 수 있다. 토큰은 이 과정에서 가치 측정과 배분의 단위가 된다.
둘째는 효율과 컴플라이언스다. 금융 업무에서 가장 많은 시간이 걸리는 영역은 정산, 검증, 보고, 규제 준수다. 토큰화된 자산과 스마트컨트랙트는 이 과정을 자동화할 수 있다. AI 에이전트는 거래 조건을 확인하고, 리스크를 평가하고, 규제 요건을 점검한 뒤 실행까지 이어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자동화만이 아니다. 추적 가능성이다. 토큰화된 거래는 분산원장 위에 기록되고, 스마트컨트랙트는 사전에 정의된 규칙에 따라 작동한다. AI가 실행한 금융 행위도 나중에 감사하고 검증할 수 있다. 이는 금융권이 AI를 도입할 때 가장 우려하는 책임성과 통제 문제를 완화할 수 있다.
셋째는 보안이다. 자율 에이전트가 금융 거래를 수행하려면 신뢰할 수 있는 보안 구조가 필요하다. 토큰화는 암호학적 보호, 분산 검증, 불변 기록을 통해 조작과 위변조 위험을 줄인다. IBM은 토큰화가 에이전틱 AI 운영에 보안 계층을 직접 심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봤다.
넷째는 에이전트 간 상거래다. IBM은 앞으로 에이전트 대 에이전트 거래가 토큰화 모델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AI 에이전트끼리 데이터를 사고팔고, 서비스를 요청하고, 자원을 배분하고, 결제를 완료하는 구조가 열릴 수 있다는 의미다.
이 지점에서 토큰화는 단순한 금융 기술이 아니라 자율 경제의 결제 언어가 된다.
임원 57% “정산 레일 토큰화가 AI 자율성 강화”
보고서의 조사 결과도 이 흐름을 뒷받침한다.
응답 임원의 57%는 정산 레일의 토큰화가 에이전틱 AI의 자율성을 상당히 강화한다고 답했다. 61%는 에이전틱 AI와 토큰화 사이에서 교차 플랫폼 상호운용성 측면의 뚜렷한 시너지가 있다고 봤다. 약 60%는 AI가 정산 레일의 투명성, 감사 가능성, 프로그래머빌리티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응답했다.
핵심은 상호운용성이다. AI 에이전트가 금융 업무를 수행하려면 여러 플랫폼, 자산, 결제망, 데이터베이스를 넘나들 수 있어야 한다. 폐쇄형 시스템에서는 AI의 이동성이 제한된다. 반면 토큰화된 자산과 프로그래머블 정산망은 AI가 다양한 금융 환경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자산을 인식하고 거래하도록 만든다.
IBM이 주목한 개념은 ‘기계가 읽을 수 있는 자산’이다.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계약서나 계좌 기록이 아니라, AI가 직접 해석하고 실행할 수 있는 자산 구조다.
자산·자산관리 부문에서는 이 항목이 에이전틱 AI가 제공하는 가장 큰 가치로 꼽혔다. 응답자의 77%가 기계가 읽을 수 있는 자산을 핵심 가치로 지목했다. 이는 자산관리의 방식 자체가 바뀔 수 있음을 의미한다.
AI는 토큰화된 자산을 직접 읽고, 포트폴리오를 자동으로 재조정하며, 조건에 맞는 거래를 실행하고, 필요할 경우 전통 화폐를 거치지 않는 교환까지 수행할 수 있다. 이 경우 커스터디언의 역할도 바뀐다. 단순히 자산을 보관하는 기관이 아니라, 가치 흐름을 조율하는 운영자가 된다.
지갑과 커스터디는 AI 금융의 핵심 인프라가 된다
에이전틱 AI가 금융 거래를 수행하려면 지갑이 필요하다. 사람의 모바일 앱이 아니라 AI가 사용할 수 있는 지갑이다.
이 지갑은 단순한 보관 도구가 아니다. AI 에이전트의 신원, 권한, 자산, 거래 기록, 결제 기능이 연결되는 실행 계층이다. 어떤 AI가 어떤 권한으로 얼마까지 거래할 수 있는지, 어떤 조건에서 결제를 승인할 수 있는지, 문제가 생겼을 때 누가 책임을 지는지까지 설계해야 한다.
여기서 커스터디의 중요성이 커진다. 토큰화된 자산이 늘어나고 AI 에이전트가 이를 다루기 시작하면, 키 관리와 접근 권한 통제는 금융 시스템의 핵심 리스크가 된다. 은행과 수탁기관은 단순 보관자가 아니라 AI 금융 활동의 게이트키퍼가 될 수 있다.
이는 전통 금융기관에 기회이자 위협이다. 은행은 규제 준수, 고객확인, 자금세탁방지, 기관 자산 관리 경험을 갖고 있다. 하지만 지갑과 커스터디 인프라를 선점하지 못하면 고객 접점은 핀테크와 블록체인 플랫폼으로 이동할 수 있다.
AI가 금융을 자동화하는 시대에는 누가 계좌를 갖고 있느냐보다 누가 지갑과 권한 체계를 쥐고 있느냐가 더 중요해질 수 있다.
자율 공급망, 로봇 경제, 그리고 금융의 새 역할
기업금융 영역에서는 변화가 더 구체적이다.
IBM은 기업들이 프로세스를 AI 자동화 중심으로 재설계하면서, AI 에이전트가 토큰화 인프라를 통해 공급망과 자율적으로 상호작용하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재고가 줄어들면 AI가 자동으로 주문을 넣고, 납품 조건이 충족되면 스마트컨트랙트가 청구서를 처리하며, 결제와 정산이 실시간으로 이뤄지는 구조다.
이는 단순한 업무 자동화가 아니다. 기업 운영 방식의 변화다. 구매, 물류, 회계, 결제, 금융이 하나의 프로그래머블 흐름으로 연결된다. 토큰화된 자산과 AI 에이전트가 결합하면 공급망 금융은 더 이상 사후 정산 중심이 아니라 실시간 실행 중심으로 바뀔 수 있다.
IBM은 이를 두고 금융 서비스가 로보틱스를 금융적으로 가능하게 함으로써 제4차 산업혁명의 한 축이 될 수 있다고 표현했다. 자율 로봇과 AI 에이전트가 스스로 자원을 사고, 서비스를 이용하고, 비용을 지불하는 세계에서는 결제 인프라가 산업 인프라가 된다.
결국 질문은 하나다. 자율 경제의 결제 레일을 누가 제공할 것인가.
은행이 그 역할을 맡으면 금융권은 AI 시대에도 중심을 지킬 수 있다. 반대로 그 역할을 놓치면 은행은 기업 고객의 자율 운영 시스템 바깥에 남을 수 있다.
양자 위협과 규제 리스크도 커진다
물론 에이전틱 AI와 토큰화의 결합은 새로운 위험도 만든다.
AI 에이전트가 지갑을 갖고, 스마트컨트랙트를 실행하고, 자산을 이동시키는 순간 공격 표면은 넓어진다. 해킹, 권한 탈취, 악성 스마트컨트랙트, 데이터 조작, 자동화된 시장 남용이 모두 현실적인 위험이 된다.
보고서는 특히 양자컴퓨팅 리스크를 지적했다. 응답 임원의 89%는 양자 위협이 이미 시스템 리스크를 증폭시키고 있다고 답했다. 블록체인과 디지털자산의 보안이 암호 기술에 기반하고 있는 만큼, 양자컴퓨팅이 기존 암호 체계를 위협할 가능성은 금융권이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할 과제다.
규제 당국의 부담도 커진다. 사람이 아닌 AI 에이전트가 거래를 실행하는 경우 책임 소재, 시장 남용, 내부통제, 감사 기준을 새로 설계해야 한다. 탈중앙 네트워크에서 표준을 유지하고 불법 거래를 차단하는 일도 더 복잡해진다.
자율 금융은 효율을 높이지만, 통제의 난도도 함께 높인다.
토큰화는 AI 금융의 전제 조건이다
IBM 보고서가 남긴 메시지는 명확하다.
토큰화는 스테이블코인이나 실물자산(RWA)을 디지털화하는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에이전틱 AI가 금융 시스템 안에서 실제로 작동하기 위한 기반 인프라다. AI가 판단하고 실행하려면, 자산과 정산망도 AI가 읽고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
반대로 에이전틱 AI는 토큰화의 가장 강력한 수요처가 될 수 있다. 사람이 토큰화된 자산을 쓰는 속도보다, 기계가 토큰화된 레일을 필요로 하는 속도가 더 빠를 수 있기 때문이다. AI 에이전트는 24시간 작동하고, 실시간 데이터를 읽고, 조건이 맞으면 즉시 거래를 실행한다. 이런 시스템에는 전통 금융의 느린 정산 구조보다 프로그래머블 토큰화 레일이 더 적합하다.
은행이 토큰레디 코어, 디지털 커스터디, 지갑 인프라, 스마트컨트랙트 대응 체계를 서둘러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것은 단지 스테이블코인 시장을 잡기 위한 준비가 아니다. 그 위에서 움직일 자율 경제 전체를 선점하기 위한 경쟁이다.
AI가 금융의 두뇌라면, 토큰화는 그 손과 발이다. 두 기술이 결합하는 순간 금융은 사람이 지시하고 은행이 처리하는 구조에서, 기계가 판단하고 네트워크가 정산하는 구조로 이동한다.
자율 금융의 서막은 이미 열리고 있다. 문제는 은행이 그 무대의 운영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관객석에서 뒤늦게 박수만 치게 될 것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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