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품 책임자, CEO로 가는 ‘비정형 경로’ 다시 주목받나

| 김서린 기자

최고경영자(CEO)로 가는 길은 정해진 공식이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 데이터는 조금 다른 그림을 보여준다. 전통적으로 COO, 사업부 CEO, 최고재무책임자(CFO), 또는 C레벨 아래에서 곧바로 발탁되는 이른바 ‘점프 승진’이 대표 경로로 꼽히지만, 더 빠르게 정상에 오른 이들은 오히려 ‘비정형 경력’을 택한 경우가 많았다는 분석이다.

벤 치셀은 최근 기고문에서 CEO 승계 연구와 ‘CEO 게놈 프로젝트’를 인용하며, 평균 24년보다 훨씬 빨리 CEO 자리에 오른 ‘스프린터’들은 화려한 직함보다 성과 책임이 분명한 역할을 통해 역량을 증명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실패한 사업부를 맡거나, 새로운 사업을 처음부터 만드는 경험이 이들의 공통점이었다고 짚었다.

이 연구가 특히 주목한 역량은 네 가지다. 빠른 판단력, 꾸준한 실행력, 변화 대응력, 그리고 조직을 하나의 계획 아래 움직이게 하는 능력이다. 치셀은 이 점에서 제품 관리, 즉 프로덕트 매니지먼트가 CEO 훈련장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주요 연구가 제품 관리자를 별도 경로로 분류하지는 않지만, 실제 업무 내용은 CEO에게 필요한 자질과 상당 부분 겹친다는 것이다.

그가 든 핵심 논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제품 관리자는 ‘제품의 성공’을 책임지고, CEO는 ‘회사의 성공’을 책임진다. 대상의 범위는 다르지만, 불확실성 속에서 방향을 정하고, 우선순위를 정리하며, 불완전한 정보로 결정을 내리고, 직접 보고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설득해 움직이는 능력은 동일하다는 설명이다.

치셀 본인도 아마존, 이베이, 스타링뱅크, 오크노스 등에서 제품과 기술 조직을 이끈 뒤 CEO 자리에 올랐다고 밝혔다. 그는 전형적인 CEO 코스를 모두 밟지 않았지만, 이사회에 자신의 역량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었던 점이 중요했다고 강조했다.

실제 사례도 제시됐다. 구글 CEO 순다르 피차이(Sundar Pichai)는 2004년 구글 툴바 제품 관리 책임자로 합류한 뒤 CEO에 올랐고, 닐 모한(Neal Mohan)은 유튜브 최고제품책임자(CPO)를 8년간 맡은 뒤 2023년 CEO가 됐다. 물론 제품 책임자와 CEO의 역할 범위는 다르지만, 치셀은 ‘범위의 확대’와 ‘핵심 역량의 변화’는 같은 의미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특히 스타트업과 스케일업에서는 제품 관리자가 사실상 ‘미니 CEO’처럼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조직이 작아 제품, 성장, 운영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한 사람이 여러 기능을 넘나들며 성과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직함보다 결과 중심의 사고가 더 강하게 요구된다.

다만 그는 제품 관리 직무가 과소평가되는 배경도 언급했다. 일부 제품 관리자는 결과보다 프로세스나 이해관계자 조율에만 머무르며, 이런 인식이 직무 전체의 평가를 끌어내린다는 지적이다. 반대로 진짜 경쟁력 있는 제품 관리자는 ‘과정을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결과를 소유하는 사람’이며, 이들이야말로 CEO 역할과 가장 닮아 있다고 봤다.

치셀이 제시한 조언도 같은 맥락이다. 차세대 경영진이나 창업가를 꿈꾼다면, 먼저 스스로 책임질 ‘숫자 하나’를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이전 역할에서 월간활성이용자수(MAU)를 봤다면, 지금은 EBITDA를 본다는 설명처럼, 직함보다 어떤 성과 지표를 끝까지 책임졌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결국 이번 글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오늘날 CEO 경로를 단순히 직함의 순서로만 설명하는 방식은 점점 낡아가고 있다. 현대 경영 환경에서는 어떤 자리에 있었는가보다 어떤 문제를 해결했고, 어떤 결과를 만들어냈는가가 더 큰 평가 기준이 된다. 그런 점에서 제대로 된 제품 관리 경험은 CEO에 필요한 감각을 가장 압축적으로 익히는 과정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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