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서울 종로구 센트로폴리스. 한국의 제조 경쟁력을 디지털 금융과 연결해 새로운 경제 질서를 주도하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날 열린 서울크립토인스티튜트(SCI) 창립 세미나에는 국회와 금융·법률·산업계, 학계 관계자들이 참석해 한국의 미래 경제 전략을 논의했다. 'G3 Korea, 크립토 대전환이 이끈다'를 주제로 열린 행사에서는 스테이블코인과 자산 토큰화, 인공지능(AI), 블록체인이 국제무역과 자본시장에 가져올 변화가 집중적으로 다뤄졌다.
행사장에서는 한국의 디지털 경제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발표가 이어졌다. 참석자들은 노트북을 펼쳐 발표 내용을 기록하며 새로운 금융 인프라가 제조업과 무역, 콘텐츠 산업에 미칠 영향에 귀를 기울였다.
이날 논의의 핵심은 분명했다. 한국이 세계적인 제품을 만드는 제조 강국에 머물지 않고, 그 제품과 서비스가 거래되는 금융·디지털 경제의 규칙까지 만드는 국가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토큰포스트는 그동안 여러 기사와 분석을 통해 암호화폐와 블록체인이 단순한 투자시장을 넘어 금융과 산업의 구조를 바꿀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이번 SCI 출범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민간 차원의 정책 연구와 제도 개선으로 발전시키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물건은 한국이 만들고, 금융의 규칙은 누가 만드는가”
SCI 초대 대표인 박종백 법무법인 태평양 파트너 변호사는 기조연설에서 한국 경제의 새로운 성장 방향을 제시했다.
한국은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과 배터리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췄지만 국제 금융과 결제, 자본시장의 규칙을 만드는 데서는 산업적 위상에 걸맞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 대표는 “우리는 세계적인 상품을 만드는 나라를 넘어서 새로운 경제 질서의 규칙을 만드는 나라가 될 수 없을까”라고 물었다.
SCI가 제시한 'G3 코리아'는 국내총생산(GDP) 세계 3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양대 경제 축 사이에서 제조 경쟁력과 디지털 기술, 금융 제도를 결합해 독자적인 영향력을 확보하자는 구상이다.
박 대표는 블록체인과 토큰화가 자산과 권리의 발행·이전·거래 방식을 바꾸고, 스테이블코인이 국제무역과 지급결제의 새로운 인프라로 발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AI 에이전트가 계약과 주문, 결제까지 수행하는 시대에는 거래의 신뢰와 권리 이전을 보장할 법적 기반도 중요해진다. 그는 기술 혁신이 실질적인 산업 경쟁력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법과 제도의 변화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크립토를 허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술이 창출하는 경제적 가치를 어떻게 안전하게 실현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밝혔다.
SCI는 이러한 연구를 정책과 입법, 실제 사업으로 연결하는 '액션 탱크(Action Tank)'를 지향한다. 국내외 전문가들과 함께 산업 현장의 문제를 발굴하고 제도 개선과 실증사업을 추진하겠다는 계획이다.
디지털 금융 패권 경쟁…한국의 전략적 선택은
첫 번째 주제 발표에 나선 강형구 한양대 경영대학 교수는 세계 금융시장이 이미 '기술 국가주의(Techno-nationalism)'의 전장으로 변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미국은 월스트리트와 실리콘밸리의 역량을 바탕으로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확장하고, 중국은 디지털 위안화와 독자적인 결제망을 추진하고 있다. 홍콩과 싱가포르 등 국제 금융 중심지들도 디지털 금융 인프라 선점에 나서고 있다는 설명이다.
강 교수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 한국도 금융·결제 인프라를 국가 경쟁력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의 정책 논의가 스테이블코인 발행 주체와 암호화폐 거래소 대주주 지분 제한 등에 집중돼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논쟁을 구한말의 성리학 논쟁에 빗댄 대목에서는 객석에서 웃음이 나왔다. 다소 신랄한 비유였지만 글로벌 금융 질서의 변화에 비해 국내 논의의 시야가 좁다는 문제의식이 담겨 있었다.
강 교수는 국제무역 결제를 대표적인 사례로 들었다. 기존 국제 송금은 여러 금융기관을 거치면서 비용과 시간이 발생하지만,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하면 거래 구조에 따라 이를 크게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기존 결제에 약 5%의 비용과 5일의 시간이 드는 상황을 가정하며, 다른 나라들이 저렴하고 신속한 결제망을 활용하는 동안 한국 기업만 기존 방식에 묶여 있다면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관세를 부과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실제 국제 결제 비용과 속도는 거래 방식에 따라 다르지만, 결제 인프라의 효율성 격차가 수출 경쟁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강 교수는 동시에 달러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 경계했다. 국제 결제의 효율성은 높아질 수 있지만 해외 금융 인프라에 대한 의존이 심화하면 국내 자금 흐름을 파악하고 관리하는 데 어려움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국가 경제의 '초크포인트(Chokepoint)', 즉 외부 충격에 취약한 핵심 지점으로 설명하며 한국도 경쟁력 있는 독자적인 결제 인프라를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외국의 금융 기술을 제한하는 것보다 한국이 스스로 경쟁할 수 있는 기술과 제도적 역량을 갖추는 일이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AI 시대, 뉴스 한 건의 가격은 누가 정할 것인가
이날 발표에서 눈길을 끈 또 다른 주제는 AI 에이전트와 콘텐츠 산업의 미래였다.
강 교수는 앞으로 AI가 사람을 대신해 정보를 검색하고 서비스를 이용하며 비용까지 지불하는 경제가 확대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러한 변화는 언론과 콘텐츠 산업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현재 인터넷 언론의 주요 수익모델은 광고와 구독이다. 그러나 AI가 수많은 웹사이트를 탐색해 필요한 정보만 제공한다면 독자가 원문을 생산한 언론사의 사이트를 방문하지 않을 수 있다. 광고 수익은 줄어들고 콘텐츠 생산 비용을 누가 부담할 것인지가 문제가 된다.
강 교수는 대안 중 하나로 AI 에이전트가 콘텐츠나 데이터를 사용할 때마다 소액을 자동 결제하는 방식을 제시했다. 인터넷 결제 프로토콜인 x402도 사례로 언급했다.
이는 단순한 결제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인터넷에서 가치가 생산되고 분배되는 구조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다.
AI가 아무리 빠르게 정보를 처리하더라도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고 현장을 취재하며 사건의 의미를 해석하는 일에는 비용이 든다. 콘텐츠 생산자가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다면 양질의 정보 생산 역시 위축될 수 있다.
AI 시대의 진정한 혁신은 정보를 더 싸게 소비하는 데만 있지 않다. 그 정보를 생산한 사람과 기업이 지속적으로 보상받는 경제 구조를 만드는 데 있다.
강 교수는 한국의 MP3 산업도 사례로 들었다. 한국 기업들은 한때 MP3 플레이어 시장을 선도했지만 음악 산업의 주도권은 이후 애플의 아이튠즈와 글로벌 스트리밍 플랫폼으로 넘어갔다.
기술을 먼저 개발하고 제품을 잘 만드는 것만으로는 시장의 최종 승자가 될 수 없다는 교훈이다. AI와 디지털 금융에서도 콘텐츠와 기술뿐 아니라 유통·결제·수익 배분 구조를 함께 설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국회 밖에서 시작된 변화…민간 주도 정책 연구의 의미
이날 김상수 국회사무차장은 한국의 제조 경쟁력을 금융과 디지털 기술 혁신으로 연결하고 새로운 국제 질서의 기준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경식 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차관도 AI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다면 블록체인은 그 가치를 신뢰할 수 있는 경제활동으로 연결하는 기술이라며 두 기술의 결합 가능성을 높이 평가했다.
이번 SCI 출범의 의미는 연구기관 하나가 더 생겼다는 데 있지 않다.
그동안 한국의 디지털 금융 정책은 정부의 입법 일정과 금융당국의 판단에 크게 좌우돼 왔다. 산업계는 규제 변화를 기다렸고, 정치권은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이런 상황에서 국회 밖의 민간 전문가들이 스스로 모여 국가 전략을 논의하고 입법 대안과 실증사업까지 추진하겠다고 나선 것은 의미 있는 변화다.
본지는 이러한 움직임을 적극 환영한다. 산업의 미래를 설계하는 일은 정부와 국회만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민간 주도의 정책 연구 역시 객관성과 독립성을 유지해야 한다. 금융 안정성과 소비자 보호, 산업 경쟁력을 균형 있게 고려하면서 연구 성과가 실제 제도 개선으로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특정 업계의 규제 완화에 그치지 않고 한국 기업이 국제 경쟁력을 갖춘 결제망을 구축하고, 자본시장 토큰화와 AI 기반 경제활동을 발전시킬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을 마련하는 일이다.
“만드는 나라”에서 “규칙을 만드는 나라”로
한국은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가 요구하는 제품을 누구보다 잘 만들어 성장했다. 그러나 앞으로의 경쟁은 물건을 누가 만드느냐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물건이 어떻게 거래되고, 대금이 어디로 이동하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가치를 누가 가져가느냐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스테이블코인과 토큰화, AI 에이전트의 결제 표준은 아직 형성되는 과정에 있다. 세계 주요 금융기관과 기술기업들이 주도권 확보에 나선 지금, 한국도 구체적인 전략과 실행에 속도를 내야 할 때다.
SCI의 출범은 이러한 변화를 향한 민간의 의미 있는 첫걸음이다. 연구가 정책으로, 정책이 산업의 경쟁력으로 이어져 한국이 새로운 디지털 경제 질서의 형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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