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에 가치를 맞춘 코인을 만드는 회사 대표가 은하제국의 몰락을 이야기했다. 기존 질서가 흔들릴 때 사람들이 살아갈 기반을 미리 만들겠다고 했다. 테더 최고경영자 파올로 아르도이노가 최근 스위스 루가노의 플랜B 포럼에서 내놓은 구상이다. 발표 제목은 ‘테더, 심리역사학의 구현’이었다. 스테이블코인 기업의 사업 설명회치고는 이야기가 크다.
Tether: a psychohistory interpretation. My latest keynote. @tether https://t.co/2dQUVAMZE5
— Paolo Ardoino 🤖 (@paoloardoino) October 27, 2026
USDT를 아는 사람도 궁금할 것이다. 테더가 왜 전력과 통신, 인공지능을 묶어 문명의 미래를 말하는가. 돈을 많이 번 기업인의 과도한 자신감인가. 아니면 거창한 이야기 속에 구체적인 전략이 있는가.
이를 이해하려면 그가 빌려온 소설부터 알아야 한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에는 오랜 번영 끝에 쇠퇴하는 은하제국이 등장한다. 사람들은 제국이 영원할 것으로 믿지만, 수학자 해리 셀던은 몰락을 예측한다. 그 도구가 ‘심리역사학(Psychohistory)’이다. 거대한 인구집단의 행동을 수학과 통계로 분석해 역사의 흐름을 예측한다는 소설 속 학문이다.
셀던은 제국의 붕괴 이후 닥칠 긴 암흑기를 줄이려 한다. 과학자와 학자를 모아 지식과 기술을 보존할 조직을 세운다. 그것이 파운데이션이다. 무너지는 질서 뒤에 다음 문명이 출발할 씨앗을 남기는 것이다.
아르도이노는 테더의 역할을 여기에 겹쳐 놓았다. 금융질서가 흔들리고 통신과 기술에 대한 통제가 강해져도 사람들이 돈을 보내고, 소통하고, 지식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어둠을 줄인다’는 뜻이다.
심리역사학은 현실에서 검증된 미래 예측 기술이 아니다. 소설이 테더의 사업 타당성을 입증해 주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비유가 거창하다고 실제 움직임까지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 이번 발표는 스테이블코인에서 얻은 자본과 유통 기반을 다음 디지털 경제의 영향력으로 전환하려는 전략으로 읽힌다. 아시모프는 그 확장에 사명을 부여하는 언어다.
테더의 사업은 이미 그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 테더 등이 참여한 개인 간 직접 연결 통신 플랫폼 홀펀치와 앱 키트는 2022년 공개됐다. 이어 기업과 개발자가 서비스에 비수탁형 지갑을 넣을 수 있는 개발도구 WDK가 나왔다. 이용자가 개인키를 직접 관리하는 지갑을 앱과 웹사이트에 붙일 수 있게 한 것이다.
AI도 같은 흐름에 있다. 테더는 개인 기기에서 작동하는 AI 플랫폼 QVAC를 공개했고, 올해 4월에는 관련 개발도구를 발표했다. 주요 기능을 외부 서버에 전적으로 맡기는 대신 이용자의 기기에서 실행하겠다는 구상이다. 이번 연설은 흩어진 사업들을 하나의 논리로 묶었다.
돈이 있어도 통신이 끊기면 거래하기 어렵다. 통신망이 있어도 전기가 없으면 기기를 켤 수 없다. AI가 생활과 업무의 필수 도구가 되면 그 기능에 접근할 권한도 중요해진다. 테더는 이런 의존을 줄이는 기술을 만들겠다고 한다. 이용자에게는 선택권을 넓히는 일이고, 테더에는 USDT가 쓰일 영역을 넓히는 일이 될 수 있다.
사업적 계산은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테더는 온라인 마켓플레이스 왑에 2억 달러를 투자하고 WDK를 통한 스테이블코인 결제 통합을 추진했다. 지갑을 만드는 도구와 그 지갑이 사용될 시장을 함께 확보하는 행보다. 개발자들이 이 기반 위에 서비스를 만들면 테더가 모든 제품을 직접 개발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독립과 금융 포용을 말하는 것은 포장에 불과한가. 그렇게 단정할 근거도 없다. 경영자의 신념과 기업의 이해관계는 함께 작동할 수 있다. 사람들이 더 쉽게 돈을 보내게 하는 기술이 테더의 시장도 키울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선의를 믿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사업이 커질수록 누구의 권한과 선택권이 커지는지 확인하는 일이다.
투자할 여력도 있다. 테더가 공개한 올해 3분기 순영업이익은 15억 달러였다. 미국 국채와 역환매조건부 거래가 주요 수익원이었다. 이런 수익은 당장 매출이 나지 않는 기술에 오래 투자할 힘이 된다. 다만 USDT 상환을 위한 준비자산과 신규 사업에 투입할 수 있는 자금은 엄격히 구분돼야 한다.
여기까지는 합리적인 사업 확장이다. 오만은 그다음에 시작된다. 금융사업에서 성공했다는 이유로 자신이 문명의 앞날까지 더 잘 안다고 믿는 순간이다. 돈을 버는 능력은 사회의 미래를 설계할 자격증이 아니다. ‘인류를 위한 사업’이라는 명분이 경영 판단에 대한 검증을 대신해서도 안 된다.
휴브리스, 곧 성공에 취한 오만인지 가르는 기준도 여기에 있다. 반대 의견을 받아들이고 실패한 투자를 수정할 수 있는가. 기술의 한계를 공개하고 약속을 검증받는가. 이용자가 테더의 도구를 쓰다가 다른 도구로 옮길 수 있는가. 독립을 약속하는 기업이라면 이용자가 그 기업으로부터 독립할 가능성까지 열어 둬야 한다.
테더의 구상에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역설도 있다. USDT는 달러 가치를 따르고, 테더는 미국 국채 등에서 수익을 얻는다. 기존 질서의 불안에 대비하겠다는 기업이 그 질서의 핵심 자산을 기반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은행 밖에서 달러를 쓰게 해준다고 달러 체제 밖으로 나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달러가 충분히 닿지 못했던 곳까지 그 영향력을 넓힐 수 있다.
기술적 독립도 구분해서 봐야 한다. 이용자가 지갑의 개인키를 보유하는 것과 USDT 발행사의 통제 권한은 별개다. 테더는 약관에 토큰 동결과 서비스 중단 권한을 명시하고 있다. 범죄 대응에 필요한 권한일 수 있지만, 누가 어떤 기준으로 행사하고 이용자는 어떤 보호를 받는지 따져야 한다. ‘탈중앙’이나 ‘독립’이라는 말만으로 책임 구조가 설명되지는 않는다.
한국이 이 발표에서 읽어야 할 것은 문명 붕괴의 예언보다 시장을 만드는 방식이다. 스테이블코인의 경쟁력은 발행에서 끝나지 않는다. 어떤 지갑에 담기고, 어떤 상거래에 쓰이며, 어떤 소프트웨어가 결제 수단으로 채택하는지가 중요하다. 돈을 발행하는 주체와 그 돈이 쓰이는 시장을 조직하는 주체가 같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원화 스테이블코인도 마찬가지다. 국내 기업이 원화 토큰을 발행하더라도 지갑과 결제망, 고객 접점과 AI 서비스를 외부 사업자가 장악하면 어떤 역할이 남는가. 발행사는 자금을 관리하고 상환 책임을 지지만, 이용자의 선택과 사업의 확장 방향은 다른 기업이 결정하는 구조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기술을 국내에서 처음부터 만들자는 뜻은 아니다. 필요한 기술을 선택하고 연결하며, 조건이 불리해지면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개방형 기술을 가져다 쓰는 데서 더 나아가 개발과 유지에 참여하고, 국내외 기업이 실제로 사용할 서비스를 만들어야 한다. 발행 자격을 정하는 일과 사용처를 만드는 일은 함께 진행돼야 한다.
테더가 파운데이션이 될지는 알 수 없다. 아르도이노가 역사의 방향을 제대로 읽고 있는지도 아직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테더는 현재의 수익을 바탕으로 다음 디지털 경제에서 영향력을 넓힐 기반을 만들고 있다.
한국이 발행할 돈의 주인을 정하는 데 머무는 동안, 다른 기업들은 그 돈이 쓰일 시장을 먼저 조직할 수 있다. 테더의 연설에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거창한 문명론에 현혹되는 일과, 그 말이 거창하다는 이유로 눈앞의 사업 전략을 놓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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