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기관의 블록체인 활용 논의가 공개 원장의 투명성과 금융 실무의 기밀성 사이에서 선택적 공개 방식으로 옮겨가고 있다. 거래 검증과 감사 가능성은 유지하되 거래 규모, 상대방, 업무 로직이 시장에 그대로 드러나는 부담을 줄이려는 흐름이다.
국제결제은행(BIS)은 2026년 7월 30일 기준 프로젝트 아고라(Project Agorá)에 8개 중앙은행과 40개 이상 금융기관이 참여했다고 밝혔다. 이 프로젝트는 토큰화된 중앙은행 준비금과 상업은행 예금을 공유 플랫폼에서 결합해 도매 국가 간 결제를 시험하는 작업이다.
핵심은 익명성이 아니다. 금융기관이 요구하는 것은 규제기관과 감사인에게 필요한 정보는 보이되 경쟁자나 일반 시장 참여자에게는 거래 세부 사항이 드러나지 않는 구조다.
이더리움재단(Ethereum Foundation)은 기관용 프라이버시 페이지에서 기관이 상대방, 데이터, 비즈니스 로직을 기밀로 유지하면서 결제와 정산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공개 블록체인을 쓰더라도 모든 정보가 모든 참여자에게 같은 방식으로 보일 필요는 없다는 접근이다.
체인링크(Chainlink)도 프라이버시 표준에서 사적 결제, 실물자산(RWA) 토큰화, 데이터 배포, 컴플라이언스 증명을 수행하면서 신원과 거래 정보, 업무 로직을 노출하지 않는 구조를 제시했다. 공개 원장의 검증 가능성을 유지하면서 공개 범위는 통제하려는 설계다.
이 흐름은 규제와도 맞물린다. 유럽증권시장감독청(ESMA)의 미카(MiCA) 체계는 가상자산 거래 주체에게 시장남용 방지와 탐지 체계를 요구한다. 거래를 완전히 보이지 않게 만드는 방식보다 필요한 경우 감시와 보고가 가능한 구조를 전제로 한다.
기관형 프라이버시 기술은 하나로 정리되지 않았다. 영지식증명(ZK)은 원자료를 노출하지 않고 조건 충족을 증명하는 데 쓰이고, 신뢰실행환경(TEE)은 하드웨어 기반 보안 실행 환경을 활용한다.
다자간연산(MPC)은 키와 승인 권한을 나눠 단일 실패 지점을 줄이는 방식이다. 완전동형암호(FHE)는 암호화된 데이터 상태에서 연산하는 기술이고, 퍼미션드 네트워크는 참여자와 데이터 접근권을 제한한다.
실험은 실제 거래 단계로 들어섰다. BIS는 프로젝트 아고라가 2026년 7월 실거래 테스트에서 28개 금융기관과 중앙은행이 약 80만 스위스프랑 규모의 거래를 완료했다고 밝혔다.
미국예탁결제원(DTCC)은 2026년 7월 15일 DTC 보관 증권을 토큰으로 전환해 실제 생산 환경 거래에 사용했다고 발표했다. 토큰화 논의가 개념 검증을 넘어 기존 금융시장 인프라와 맞물리는 단계로 확장되고 있다는 의미다.
시장 구조상 기관이 공개 블록체인을 부담스러워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전통 금융에서 거래 규모, 상대방, 포지션, 유동성 수요는 핵심 영업 정보로 취급된다. 공개 원장에서 이 정보가 과도하게 드러나면 가격 형성, 거래 전략, 고객 관계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한국 독자에게도 이 논의는 토큰화 자산과 기관형 결제 인프라의 설계 문제로 이어진다. 본지는 앞서 공개 블록체인의 투명성이 지갑 잔액과 거래 관계를 과도하게 노출할 수 있다는 문제 제기를 전한 바 있다. 이 쟁점은 개인 이용자뿐 아니라 금융기관의 업무 정보 보호에도 적용된다.
다만 기관용 프라이버시는 프라이버시 코인이나 완전한 익명성과 같은 개념이 아니다. 금융기관은 자금세탁방지(AML), 고객확인(KYC), 제재 점검, 감사 대응을 피할 수 없다. 시장의 질문은 '숨길 것인가'가 아니라 '누구에게, 어디까지, 어떤 근거로 보여줄 것인가'에 가깝다.
따라서 기관용 블록체인 프라이버시 경쟁은 기술 성능만의 문제가 아니다. 공개 범위, 감사 가능성, 규제 대응, 상호운용성을 함께 따지는 인프라 설계 문제로 남아 있다. 공개 블록체인의 투명성이 금융 실무의 기밀성과 충돌하는 한 선택적 공개는 기관 채택 논의의 중심에 머물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