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이 예상하지 못한 산업을 깨우고 있다. 바로 핵융합이다.
AI 데이터센터가 천문학적인 전력을 소비하면서 태양광과 풍력만으로는 늘어나는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우려가 커지자, ‘지상의 인공태양’으로 불리는 핵융합에 세계의 자금이 몰리고 있다.
핵융합산업협회(FIA)에 따르면 2026년 7월까지 최근 12개월 동안 세계 핵융합 기업들이 유치한 자금은 44억8000만 달러로 집계됐다. 전년보다 69% 늘어난 사상 최대 규모다. FIA가 조사를 시작한 2021년 이후 누적 투자액은 142억4000만 달러에 달했고, 관련 산업 종사자도 1만6000명을 넘어섰다.
핵융합이 더 이상 과학자의 연구 과제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의미다. 기업들은 발전소 부지를 고르고, 빅테크와 전력구매계약을 맺고, 실제 전력망에 전기를 공급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AI가 불러낸 새로운 전력 경쟁
핵융합은 태양이 에너지를 만드는 원리를 지상에서 재현하는 기술이다.
우라늄 원자를 쪼개 에너지를 얻는 기존 원자력발전의 핵분열과 달리, 수소처럼 가벼운 원자핵을 결합해 막대한 에너지를 만든다. 탄소를 배출하지 않으면서도 날씨와 시간에 관계없이 대규모 전력을 공급할 수 있다는 점에서 ‘꿈의 에너지’로 불려왔다.
문제는 늘 상용화 시점이었다. 핵융합은 수십 년 동안 “앞으로 30년 뒤면 가능하다”는 농담의 대상이었다. 태양보다 뜨거운 플라스마를 안정적으로 가두고, 투입한 에너지보다 더 많은 전력을 생산하는 일이 그만큼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AI가 상황을 바꿨다.
AI 모델을 학습하고 운영하는 데이터센터는 기존 인터넷 서비스보다 훨씬 많은 전기를 사용한다. 빅테크들은 데이터센터를 계속 지어야 하지만 전력망과 발전소 건설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전기가 부족하면 반도체가 있어도 AI를 돌릴 수 없다.
핵융합은 성공만 한다면 대규모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 기술기업들이 핵융합을 먼 미래의 과학 프로젝트가 아니라 AI 시대의 전력 인프라로 보기 시작한 이유다.
FIA가 조사한 핵융합 기업 가운데 71%는 첫 상업용 핵융합 발전소가 2030년대에 전력을 공급할 것으로 전망했다. 현재 6개 기업이 발전소 부지 계약을 확보했고, 5개 기업은 전력구매계약이나 이에 준하는 상업적 계약을 체결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아직 없는 전기를 먼저 샀다
상용화 경쟁에서 가장 공격적인 기업은 미국의 헬리온에너지다.
헬리온은 2023년 마이크로소프트와 세계 최초의 핵융합 전력구매계약을 체결했다. 워싱턴주 말라가에 건설하는 핵융합 발전소 ‘오리온’을 통해 2028년부터 최소 50메가와트(MW)의 전력을 공급한다는 계획이다. 전력 판매와 송전은 미국 에너지기업 콘스텔레이션에너지가 맡는다.
50MW는 대형 발전소와 비교하면 크지 않다. 그러나 아직 상업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핵융합 발전소의 전기를 빅테크가 미리 사기로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단순히 기술 개발을 응원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핵융합이 실제로 성공할 경우 생산될 전력의 첫 고객이 되기로 한 것이다. 핵융합 기업 입장에서는 발전소를 완성했을 때 전기를 사줄 고객을 미리 확보함으로써 사업 위험을 줄일 수 있다.
헬리온은 2026년 6월 4억6500만 달러 규모의 투자도 유치했다. 투자 이후 기업가치는 155억 달러로 평가됐다. 회사는 자금을 핵융합 장비 생산 확대와 발전소 건설에 투입할 계획이다.
연구실에서 실험 장치를 만드는 기업이 발전소를 건설하고 전기를 판매하는 사업자로 변하고 있는 셈이다.
구글·엔비디아가 선택한 CFS
핵융합 업계에서 가장 많은 민간 자금을 확보한 기업은 미국 커먼웰스퓨전시스템스(CFS)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분사한 CFS는 2025년 8월 8억6300만 달러의 투자를 유치했다. 누적 투자액은 약 30억 달러에 달한다. 신규 투자에는 엔비디아의 벤처투자 조직인 엔벤처스와 모건스탠리의 카운터포인트글로벌, 스탠리 드러켄밀러 등이 참여했고, 기존 투자자인 구글과 브레이크스루에너지벤처스도 추가로 자금을 넣었다.
CFS가 먼저 건설하고 있는 것은 ‘스파크(SPARC)’다.
스파크는 전기를 판매하는 상업 발전소가 아니라, 핵융합 반응에서 투입량보다 많은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증명하는 실증 장치다. 회사는 고온초전도 자석을 이용해 기존 핵융합 장치보다 작은 크기로 강력한 자기장을 만드는 방식을 택했다.
CFS는 2027년 스파크를 통해 상업적으로 의미 있는 순에너지 생산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스파크가 기술을 증명하는 시험대라면 ‘아크(ARC)’는 실제 전력을 판매할 발전소다.
CFS는 미국 버지니아주 체스터필드카운티에 400MW 규모의 아크 발전소를 건설할 계획이다. 약 15만 가구가 사용할 수 있는 전력량으로, 2030년대 초 전력망 연결을 목표로 하고 있다.
구글은 아크 발전소가 생산할 전력의 절반에 해당하는 200MW를 구매하기로 했다. 이탈리아 에너지기업 에니도 10억 달러가 넘는 전력구매계약을 맺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발전소의 고객이 먼저 줄을 서기 시작한 것이다.
유럽도 4억1100만 유로 승부수
핵융합 경쟁은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독일 뮌헨에 본사를 둔 프록시마퓨전은 2026년 7월 4억1100만 유로를 조달했다. 이번 투자로 프록시마의 기업가치는 24억 유로로 평가됐으며, 유럽에서 가장 많은 자금을 확보한 핵융합 기업으로 올라섰다.
투자에는 구글과 독일 전력회사 RWE가 전략적 투자자로 참여했다. 독일 국책 투자기관 KfW캐피털과 기술혁신기관 SPRIND, 유럽혁신위원회 펀드 등도 자금을 댔다.
프록시마는 독일 막스플랑크 플라스마물리연구소에서 처음 분사한 기업이다. 세계 최대 수준의 스텔러레이터 연구시설인 ‘벤델슈타인 7-X’에서 축적된 기술을 상업 발전소로 연결하려 하고 있다.
CFS가 도넛 모양의 토카막 방식을 이용한다면, 프록시마는 복잡하게 꼬인 자기장을 만드는 스텔러레이터 방식을 택했다.
토카막은 상대적으로 구조가 단순하고 연구가 많이 진행됐지만, 플라스마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스텔러레이터는 설계와 제작이 훨씬 복잡한 대신 플라스마를 안정적으로 가둘 수 있어 장시간 연속 운전에 유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프록시마는 뮌헨 인근에 순에너지 생산을 실증할 ‘알파’를 건설해 2030년대 초 가동하고, 2030년대 후반에는 상업용 발전소 ‘스텔라리스’를 선보인다는 계획이다.
과학의 경쟁에서 제조업의 경쟁으로
최근 핵융합 산업의 가장 큰 변화는 경쟁의 성격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누가 더 오랫동안 플라스마를 유지하고 더 높은 온도를 달성하느냐가 핵심이었다. 이제는 자석과 냉각장치, 전력변환 설비를 얼마나 빠르고 싸게 생산할 수 있는지가 중요해지고 있다.
발전소 부지를 확보하고 규제기관의 허가를 받는 일도 필요하다. 핵융합 반응에 견딜 수 있는 소재와 안정적인 연료 공급망도 갖춰야 한다. 핵융합은 물리학의 문제를 넘어 거대한 제조업과 인프라 사업으로 이동하고 있다.
FIA 조사에서도 자금 부족과 함께 발전 효율, 중성자를 견디는 소재, 삼중수소 확보가 핵융합 상용화의 주요 과제로 꼽혔다. 기업들이 2030년대 상용화를 자신하고 있지만, 이를 확정된 일정으로 받아들이기는 이르다는 뜻이다.
핵융합 투자, 기대가 현실보다 앞설 위험도
44억8000만 달러라는 투자 규모는 핵융합 산업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투자가 늘었다고 기술적 난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현재 어떤 민간 기업도 핵융합으로 전력망에 상업용 전기를 공급한 적이 없다. 실험에서 순에너지 생산에 성공하는 것과, 발전소 전체가 소비하는 전력보다 많은 전기를 안정적으로 생산해 판매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기업들이 제시하는 상용화 일정도 대부분 회사의 자체 목표다. 실제 발전소를 운영하려면 기술 검증과 인허가, 자금 조달, 대량 생산, 전력망 연결을 모두 통과해야 한다.
그럼에도 달라진 점은 분명하다.
과거 핵융합의 고객은 정부 연구기관이었다. 지금은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 같은 기업이 전력을 사겠다고 계약하고, 엔비디아와 글로벌 투자기관이 직접 자금을 넣고 있다.
AI가 핵융합 기술을 완성한 것은 아니다. 대신 핵융합을 완성해야 할 경제적 이유를 만들어냈다.
반도체가 AI의 두뇌라면 전력은 AI의 혈액이다. 앞으로의 AI 경쟁은 더 좋은 모델이나 더 빠른 반도체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을 멈추지 않고 가동할 전기를 누가 먼저 확보하느냐가 승부를 가를 수 있다.
핵융합은 아직 ‘인공태양’에 가깝다. 다만 이제 그 태양을 연구실 밖으로 끌어내려는 자본과 고객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