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만드는 비용은 크게 낮아졌지만, 투자를 받는 문턱은 오히려 높아지고 있다. 생성형 AI 도구 덕분에 창업자는 주말 사이 작동하는 제품을 만들고, 하루 만에 웹사이트를 열 수 있게 됐지만, 투자자는 이제 그 ‘속도’만으로는 움직이지 않는다.
최근 스타트업 시장에서는 시드 투자 이후 시리즈 A로 넘어가는 비율이 몇 년 전보다 낮아졌고, 2026년 들어 초기 투자 시장 전반도 위축된 흐름을 보이고 있다. 자금이 줄어든 만큼 투자금은 더 적은 수의 유망 기업에 집중되고 있다. 시장의 관심은 ‘무엇을 만들 수 있느냐’보다 ‘왜 이 창업자가 이 시장을 누구보다 잘 아느냐’로 이동하는 분위기다.
과거에는 인터넷 활용 능력이나 컴퓨터 이해도가 창업자의 핵심 경쟁력이었다면, 지금은 AI를 자연스럽게 활용하는 능력이 사실상 기본값이 됐다. AI 코파일럿, API, 로우코드 도구를 활용해 빠르게 만들고 시험하고 수정하는 일은 더 이상 일부 기술 인력만의 영역이 아니다.
이 때문에 단순한 개발 역량만으로는 차별화가 어려워졌다. 제품 자체가 더 이상 강력한 ‘해자’가 되기 힘들어지면서, 투자자들은 창업자의 산업 전문성, 고객 이해도, 시장 진입 전략을 더 중요하게 보기 시작했다. 이른바 ‘창업자-시장 적합성’이 초기 투자 판단의 핵심 기준으로 떠오른 셈이다.
AI는 무엇이든 만들어주는 도구일 수 있지만, 고객이 실제로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판단하는 능력까지 대신해주지는 못한다. 무엇이 팔릴지, 어떤 문제가 진짜 불편인지, 고객이 왜 지갑을 열지에 대한 감각은 여전히 현장 경험과 인간관계, 산업 지식에서 나온다. 지금 시장에서 가장 희소한 자원도 바로 이 부분이다.
AI 확산은 초기 스타트업의 팀 구조에도 변화를 만들고 있다. 미국 비상장사 관리 플랫폼 카르타(Carta)에 따르면 지난해 시드 단계 기업의 평균 직원 수는 6명 조금 넘는 수준으로, 2021년 10명 이상에서 크게 줄었다.
팀이 작아진 만큼 채용 한 명의 영향력은 더 커졌다. 이제 초기 기업이 우선적으로 원하는 인재는 대규모 엔지니어 조직이 아니라, AI 도구를 활용해 빠르게 제품을 출시할 수 있는 ‘프로덕트 감각’의 실무자, 고객 관계를 직접 맡아 초기 매출을 만드는 인물, 그리고 제품 포지셔닝과 수요를 만들어낼 수 있는 마케팅 역량 보유자다.
이는 스타트업 운영 방식이 기술 중심에서 ‘실행과 시장 검증’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적은 인원으로 더 많은 일을 해야 하는 환경에서, 고객을 이해하고 바로 매출로 연결할 수 있는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는 뜻이다.
문제는 AI가 투자자들이 보던 기존 신호까지 흐리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그럴듯한 설명 자료, 세련된 마케팅 문구, 완성도 높아 보이는 시제품은 이제 짧은 시간 안에도 만들어낼 수 있다. 겉으로는 신뢰할 만해 보여도 실제 경쟁력이나 진정성이 부족한 ‘스타트업 슬롭’이 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특히 소프트웨어 스타트업 분야에서는 단기간에 외형을 갖춘 뒤 신뢰를 포장하는 일이 쉬워졌다. 이에 따라 단순히 많은 딜을 검토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 있는 성과 지표가 아니라는 평가도 나온다. 제출 건수는 늘었지만, 실제 검토 가치가 있는 기업은 오히려 가려내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반면 딥테크 분야는 상대적으로 ‘가짜 신호’를 만들기 어렵다. 치료제 개발, 하드웨어, 첨단 제조업처럼 실제 과학 기술, 핵심 전문가, 협력 네트워크가 필요한 영역은 여전히 진입장벽이 높다. 최근 투자자들의 딥테크 선호가 꾸준히 높아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투자자들은 이제 더 구체적인 질문으로 창업자를 검증하려 한다. 왜 이 지역에서 회사를 키우려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고객 조사를 했는지, 애초에 왜 이 회사를 시작했는지를 묻는 식이다. 답변 속에서 창업자의 확신과 문제의식, 실제 경험이 묻어나는지가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
결국 초기 단계 투자에서 여전히 통하는 신호는 ‘코칭 수용력’, ‘실행력’, ‘진정성’이다. AI가 회사 소개서를 대신 써주고, 시연용 제품을 빠르게 만들 수는 있어도, 창업자가 실제로 그 문제를 오래 겪었는지, 얼마나 집요하게 고객을 만나고 있는지까지 위조하기는 어렵다.
창업자가 에너지를 써야 할 지점도 달라졌다. 기술 구현의 일부를 AI가 덜어주는 만큼, 이제는 판단력, 창의성, 스토리텔링, 관계 형성 같은 상위 역량이 더 중요해졌다. 이메일 답변이 지나치게 늦거나, 투자자 업데이트를 빼먹거나, 미팅 이후 후속 조치를 하지 않는 행동 역시 예전보다 더 부정적인 신호로 읽힌다. AI로 반복 업무의 마찰이 줄어든 시대에는 이런 ‘느림’ 자체가 경영 방식의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AI는 창업의 진입장벽을 낮췄지만 투자 유치의 기준은 더 높였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신호는 늘었지만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는 더 어려워졌고, 창업자 입장에서는 제품을 만드는 속도보다 시장을 이해하는 깊이가 더 중요해졌다.
결국 자금을 끌어오는 창업자는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두드러질 가능성이 크다. 남들이 모르는 문제를 정확히 알고, 그 해법을 누구보다 설득력 있게 설명하며, 고객이 실제로 원하는 것을 더 빨리 증명하는 사람이다. AI 시대 스타트업 투자 시장의 핵심도 결국 기술이 아니라 ‘사람과 통찰’로 다시 모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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