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화폐 자기보관의 기준이 개인키 보유에서 지갑 구조와 복구 정보 관리로 넓어지고 있다. 멀티시그, HD 지갑, 탭루트 이후의 지갑 환경에서는 키를 갖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소유와 복구 가능성을 설명하기 어려워졌다는 분석이다.
크립토브리핑(CryptoBriefing)은 20일 분석에서 'Not your keys, not your coins'라는 구호가 여전히 유효하지만, 자기보관의 실무 범위는 디스크립터(descriptor), 다자간연산(MPC), 엔트로피(entropy)까지 포함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고 전했다. 논의의 초점은 '키를 갖고 있느냐'에서 '복구 가능한 운영 단위를 갖췄느냐'로 옮겨가고 있다.
이 문제의식은 새로 나온 것이 아니다. 눈척(Nunchuk)은 2020년 글에서 P2SH 멀티시그, HD 지갑, 세그윗, 탭루트로 주소 생성 방식이 복잡해졌다고 설명했다. 눈척은 "master keys(or BIP39 seeds) + descriptors"를 함께 백업해야 한다고 적었다.
개인키나 시드만 남아 있어도 파생 경로, 스크립트 유형, 키 순서 같은 정보가 빠지면 지갑 복구는 어려워질 수 있다. 지갑이 어떤 주소와 출력을 자기 것으로 봐야 하는지 판단하려면 키 외의 구조 정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비트코인 코어(Bitcoin Core) 문서도 같은 방향을 뒷받침한다. 비트코인 코어 0.21 릴리스 노트는 디스크립터 지갑이 scriptPubKey 정보를 output descriptor로 저장한다고 밝혔다. 또 디스크립터 지갑에 완전한 디스크립터를 가져오기 위한 importdescriptors RPC가 추가됐다고 설명했다.
비트코인 코어의 디스크립터 문서는 output descriptor를 출력 스크립트 묶음을 설명하는 언어로 정의한다. 지갑은 이 정보를 바탕으로 어떤 출력이 자기 것인지 판단한다. 지갑 복구가 단순히 시드 문구를 다시 입력하는 절차에 그치지 않는 이유다.
시드 관리도 단순한 메모 문제가 아니다. 비트코인 개발자 문서는 HD 지갑의 루트 시드가 128비트, 256비트 또는 512비트 랜덤 데이터에서 만들어진다고 설명한다. BIP39는 니모닉이 128~256비트 엔트로피를 담아야 하며, 엔트로피가 많을수록 보안은 좋아지지만 문장 길이는 늘어난다고 명시했다.
엔트로피는 개인키 생성에 쓰이는 무작위성이다. 무작위성이 약하면 시드 문구가 있어도 보안의 출발점이 흔들린다. 이용자가 보관하는 복구 문구의 품질과 보관 방식이 곧 자기보관의 첫 단계가 되는 구조다.
MPC도 자기보관의 의미를 넓히는 요소다. 코인베이스($COIN)의 cb-mpc 문서는 HD 지갑이 널리 쓰이는 이유를 설명하면서도, 표준 BIP32 파생을 MPC로 계산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비용이 크다고 적었다. 또 BIP39의 HMAC-SHA512 반복 구조가 MPC에서 실용적이지 않다고 보고, 별도의 MPC 친화적 HD 방식을 설명했다.
MPC는 단일 개인키 노출 위험을 낮출 수 있지만, 구현 방식과 복구 절차를 따로 봐야 한다. 서명 권한을 어떻게 나누고 되찾는지, 이용자와 서비스 사업자 사이의 신뢰 가정이 어디까지인지가 자기보관의 실제 수준을 가른다.
하드웨어 지갑 업계의 언어도 바뀌고 있다. 렛저(Ledger)는 2025년 공개하고 2026년 갱신한 문서에서 'hardware wallet'보다 'signer'가 장치 역할을 더 정확히 설명한다고 밝혔다. 자산은 장치 안에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체인 위에 있고, 장치는 개인키를 보호하며 거래와 승인에 서명한다는 설명이다.
이 변화는 자기보관을 '보관 장치'가 아니라 '서명과 승인 체계'로 보는 흐름과 맞닿아 있다. 통상 이용자는 하드웨어 지갑을 자산을 넣어 두는 금고처럼 이해하지만, 실제 구조에서는 장치가 거래 승인권을 행사하는 서명자에 가깝다.
한국 이용자에게도 의미가 작지 않다. 거래소에 둔 자산과 개인 지갑에 둔 자산의 차이는 익숙해졌지만, 개인 지갑 안에서도 단일 시드, 멀티시그, 디스크립터 지갑, MPC 지갑은 복구 방식이 다르다. 콜드카드 피해 사례에서 하드웨어 지갑 보안 논의가 부각된 뒤, 자기보관은 제품 선택보다 백업 구조와 서명 검증 절차의 문제로 좁혀지고 있다.
업계와 커뮤니티의 반응도 같은 흐름을 보인다. 일부 지갑 업체와 비트코인 커뮤니티는 자기보관을 키 보유보다 넓은 사용자 통제 문제로 설명하고 있다. 다만 마케팅성 표현과 실제 보안 수준은 구분해야 하며, 복구 절차와 서명 검증 방식은 제품별로 따로 확인해야 한다.
결국 'Not your keys, not your coins'는 폐기된 구호가 아니라 조건이 늘어난 구호에 가깝다. 개인키나 시드를 직접 보관하더라도 어떤 지갑 구조를 쓰는지, 어떤 디스크립터와 파생 경로가 필요한지, 서명 장치와 복구 절차가 어떻게 연결되는지까지 관리해야 한다. 자기보관의 실효성은 각 이용자의 보안 역량과 운용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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