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스테이블코인, 두려워할 것인가 활용할 것인가

| 토큰포스트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공급량이 3,000억 달러를 돌파했다. 국내외 금융당국과 은행권은 일제히 경보음을 울리고 있다. 예금이 블록체인으로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영국 중앙은행은 보유 한도 규제를 검토하고 있고, 국내 금융당국 역시 스테이블코인을 잠재적 위협 요인으로 분류해 관리하는 데 방점을 찍고 있다.

그러나 냉정하게 물어야 한다. 과연 이 진단이 옳은가.

질문 자체가 틀렸다

시티그룹에서 20년 가까이 글로벌 결제 인프라를 설계하고, 연방준비제도·영란은행과 블록체인 실증 사업을 이끌었던 토니 맥라플린은 단호하게 말한다. "질문 자체가 틀렸다."

많은 규제 당국이 스테이블코인을 '법정화폐를 참조하는 암호화폐 자산'으로 정의한다. 맥라플린은 이것이 수표를 '법정화폐를 참조하는 종이 조각'으로 정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오류라고 지적한다. 기술적 형태가 아니라 그 법적 약속의 본질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점토판이든 종이든 블록체인이든, "일정 금액을 지급하겠다"는 약속의 법적 본질은 동일하다. 스테이블코인은 암호화폐가 아니라 상법 역사상 가장 오래된 금융 수단 중 하나인 유통증권(negotiable instrument)의 최신 형태다. 이 인식의 전환이 모든 것을 바꾼다.

여행자 수표가 사라진 진짜 이유

역사는 이미 답을 내놓은 바 있다.

1891년 아메리칸 익스프레스가 선보인 여행자 수표를 기억하는가. 발행사에 미리 돈을 맡기면 전 세계 어디서든 액면가 그대로 쓸 수 있었다. 속성만 보면 오늘날의 스테이블코인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선납, 완전 담보, 무이자, 소지인 양도 가능, 액면가 환급.

여행자 수표가 세계 어디서나 통용됐던 것은 종이가 특별해서가 아니었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와 비자, 토마스 쿡이 구축한 청산 네트워크가 뒤를 받쳤기 때문이다. 신용카드가 이 청산 네트워크를 흡수하고 편의성까지 압도하자, 여행자 수표는 하룻밤 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수단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인프라가 대체된 것이다.

스테이블코인은 지금 정확히 이 기로에 서 있다. 공개 블록체인 위에서 수초 만에 국경을 넘는다. 그러나 규제된 금융기관을 통해 액면가로 환급받을 수 있는 보편적 청산 메커니즘이 없다. 수단은 있되 인프라가 없는 것이다.

360억 달러의 역설

맥라플린의 계산은 간명하다.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1조 달러에 이르고 일일 유통량의 0.5%가 환급된다고 가정하면, 연간 약 1조 8,000억 달러의 처리 거래가 발생한다. 여기에 처리 수수료 1%와 국가 간 외환 스프레드 1%를 적용하면 연간 360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50조원의 수익 풀이 생겨난다.

위협으로 분류했던 바로 그 자산이, 청산 인프라 하나를 갖추는 것만으로 수익원으로 전환된다는 역설이다.

비미국권 은행에는 더욱 매력적이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받아 원화나 유로로 환전해주는 순간, 그것은 고스란히 외환 수익이 된다. 수천 개의 카드 발행 은행이 존재하지만 어느 가맹점에서나 카드 결제가 통용되는 것은 비자와 마스터카드라는 청산 네트워크가 중간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스테이블코인에도 그 중간자가 필요하다.

맥라플린이 창업한 유빅스(Ubyx)가 노리는 자리가 바로 그곳이다. 영국 2위 은행 바클레이즈가 올해 초 이 회사에 전략적 지분 투자를 단행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유럽 최대 은행 중 하나가 스테이블코인 청산 인프라에 처음으로 베팅한 것이다.

한국 금융권에 고한다

이 논의가 우리와 무관하다고 여긴다면 오산이다.

원화 환전 수요가 큰 국내 은행들에게 스테이블코인 청산은 새로운 외환 수익의 통로가 될 수 있다. 국내 핀테크와 가상자산 거래소들이 이미 스테이블코인 기반 결제를 빠르게 확장하는 상황에서, 인프라 선점 여부가 수년 내 경쟁의 판도를 가를 수 있다.

맥라플린의 조언은 냉철하다. "먼저 받고, 나중에 발행하라." 자체 스테이블코인 발행에 앞서, 남의 스테이블코인을 처리할 인프라부터 갖추는 것이 실익이라는 뜻이다. 청산 네트워크가 갖춰지면 스테이블코인 발행은 은행이 자체 카드를 내놓는 것만큼 단순해진다.

스테이블코인이 예금 이탈의 통로가 될 가능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자 지급 허용 여부와 규제의 향방에 따라 그 위험이 현실화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두려움에 머물러 인프라 구축을 미루다가는 위험도 수익도 모두 외국 기관에 내줄 수 있다는 사실이다.

20년 전 인터넷뱅킹 도입을 주저하다 뒤처졌던 금융기관들의 전례가 있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종종 운율을 맞춘다.

지금 던져야 할 질문은 하나다. 어떻게 막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본 기사는 시장 데이터 및 차트 분석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특정 종목에 대한 투자 권유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