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RWA(실물자산 토큰화)를 앞서가는 나라로 미국·영국·스위스·독일·프랑스·싱가포르·홍콩·일본 등이 거론된다. 이 나라들을 지도에 올려보면 한국이 보이지 않는다. 공식 순위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왜 한국이 빠지는지가 중요하다.
세계는 지금 코인을 더 만드는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다. 금융의 새 레일을 까는 경쟁을 하고 있다.
영국은 디지털증권 샌드박스에서 증권의 거래·결제와 중앙예탁 기능까지 새로운 기술 위에서 시험하고 있다. 스위스는 2021년부터 디지털증권 거래소와 중앙예탁기관을 제도권 안에서 운영하고 있다. 미국 SEC도 올해 1월 토큰화 증권에 대해 기존 증권법 체계가 그대로 적용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토큰화는 법을 피해 가는 기술이 아니라, 금융의 기록·거래·결제 방식을 바꾸는 기술이라는 것이다.
이 변화의 본질은 RWA라는 이름에 있지 않다. 주식·채권·펀드·예금과 돈이 앞으로 어떤 시스템 위에서 발행되고 거래되고 결제될 것인가의 문제다. 자산과 돈이 동시에 움직이고, 투자자 자격과 규제 준수가 거래 구조 안에서 자동으로 작동한다면 자본시장의 비용과 속도는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
세계는 자산 가격이 아니라 자본시장의 배관을 바꾸고 있다.
한국도 기술이 없는 나라는 아니다. 금융위원회는 2023년 토큰증권 제도화 방안을 발표했고 한국은행도 예금토큰과 프로그래머블 금융을 시험해왔다.
문제는 속도다.
토큰증권 관련 법안은 2026년 1월에야 국회를 통과했다. 실제 제도 시행은 2027년 2월이다. 2023년 정책 방향을 발표한 뒤 시장이 법적 기반을 얻기까지 4년이 걸리는 셈이다.
그뿐 아니다. 암호화폐 발행·유통과 사업자 규율, 스테이블코인 등을 포괄할 디지털자산기본법도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3월에도 이를 ‘가상자산 2단계법’으로 부르며 정부 검토안을 논의하고 당정 협의를 추진하겠다고 했다. 스테이블코인 발행 구조를 둘러싼 핵심 쟁점도 여전히 제도 설계 단계다.
세계가 미래 금융의 규칙을 만드는 동안 우리는 아직 규칙을 논의하고 있는 것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한국 금융시장의 시선이다.
우리는 여전히 코스피가 얼마나 올랐는지, 개인 돈이 주식으로 갔는지 코인으로 갔는지, 어느 시장의 거래대금이 늘었는지를 놓고 이야기한다.
주식시장이 살아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없애고 기업가치를 제대로 평가받게 하는 것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주가를 올리는 것과 미래 금융을 선점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한국은 기존 시장에서 돈이 어디로 갈 것인지를 보고 있다.
싱가포르와 홍콩, 영국과 스위스는 앞으로 그 돈이 어느 길로 다닐 것인지를 만들고 있다.
이 차이가 다음 달 더 선명하게 드러날 수도 있다.
9월 말 서울에서는 코리아블록체인위크(KBW)가 열린다. 일주일 뒤 싱가포르에서는 TOKEN2049가 열린다. TOKEN2049 측은 올해 행사에 160여 개국, 7000여 기업에서 2만5000명 이상이 참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최근 필자가 알고 지내는 여러 글로벌 암호화폐 기업 관계자들에게서 같은 이야기를 듣고 있다.
“올해는 서울을 건너뛰고 싱가포르로 간다.”
공식 통계는 아니다. 이를 글로벌 기업 전체의 움직임으로 일반화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이런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이유도 비슷하다. 한국 투자자의 관심이 주식시장으로 크게 이동했고 암호화폐 시장의 열기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에 2027년 1월부터 예정된 암호화폐 소득 과세도 거론된다. 과세가 아직 시행된 것은 아니지만, 해외 기업은 오늘의 거래량뿐 아니라 내일의 시장 환경도 보고 사람과 돈을 배치한다. 현행법상 암호화폐 양도·대여 소득 과세는 2027년 1월 1일부터 시작될 예정이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KBW 관객 숫자가 아니다.
그들이 서울 행사만 건너뛰는 것인지, 한국 시장을 건너뛰기 시작하는 것인지다.
투기적 자금은 쉽게 움직인다. 오늘 주식으로 간 돈은 내일 코인으로, 다음 날 미국 시장으로 갈 수 있다. 가격과 거래대금은 한 사이클이면 뒤집힌다.
금융 인프라는 다르다.
한번 레일이 깔리면 은행과 증권사, 수탁기관과 발행사, 투자자와 자본이 그 위에 붙는다. 법과 회계, 결제 관행도 따라간다.
가격의 우위는 짧다. 인프라의 우위는 수십 년을 간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주식과 암호화폐 중 어느 시장에 돈을 몰아줄지 정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자산이 등장하더라도 한국에서 발행되고 거래되고 수탁되고 결제될 수 있도록 금융 인프라를 만드는 것이다.
토큰증권법만으로 부족하다. 디지털자산기본법이 필요하고 스테이블코인 규칙도 정해야 한다. 증권과 예금, 디지털 화폐와 결제 시스템이 함께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철도는 기관차 한 대를 허가한다고 만들어지지 않는다. 선로와 역, 신호와 운행 규칙이 함께 있어야 한다.
금융도 마찬가지다.
한국에는 기술이 있다. 금융회사도 있고 세계적 수준의 IT·결제 인프라도 있다.
부족한 것은 능력이 아니다.
속도와 방향이다.
한국은 아직 가격을 보고 있다.
세계는 레일을 깔고 있다.
법은 기다릴 수 있다.
시장은 기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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