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생산을 미국으로 옮기려면 공장 이전을 넘어 세계 각지에 축적된 기술과 협력 체계를 함께 구축해야 한다는 진단이 나왔다. 첨단 반도체 공급망은 기업들이 수십 년 앞을 내다보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기술을 공동 개발해 온 결과물이라는 분석이다.
10월 24일(현지시간) 블룸버그 인터뷰에서 저널리스트 기디언 루이스크라우스는 반도체를 채굴하거나 생산지만 옮기면 되는 천연자원처럼 보는 시각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한 거점을 통째로 들어 옮긴다고 모든 생산을 자국으로 되돌릴 수는 없다"며 반도체 산업의 상호의존성을 강조했다.
루이스크라우스는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업체 ASML의 극자외선 노광장비를 이런 협력의 대표 사례로 들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ASML은 현재 기술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독일 광학업체 자이스에 10년 뒤 필요한 거울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자이스 역시 유리 공급업체에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던 열역학적 특성을 갖춘 유리를 개발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공급망 전체가 실현 가능성조차 확실하지 않은 발명을 미리 약속하고 이를 구현해 온 구조라고 설명했다.
극자외선 노광장비의 작동 과정도 생산 확대가 어려운 이유를 보여준다고 봤다. 루이스크라우스는 진공실 안으로 분사한 미세한 주석 방울에 레이저를 쏴 빛을 만들고, 극도로 매끄러운 거울로 이 빛을 모아 회로 패턴을 반도체에 전사한다고 설명했다. 이 과정에는 초당 6만 차례 방울을 겨냥하는 레이저와 정밀한 위치 제어 장치 등이 필요하며, 개발 초기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난제까지 해결해야 했다고 전했다.
생산 효율을 높이거나 특정 공정의 문제를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이런 장비의 공급을 빠르게 늘리기 어렵다는 지적도 내놨다. 그는 반도체 공급망을 "하나의 세계적인 초유기체"에 비유하며, 한 기업이 변화를 추진하려면 다른 기업들도 보조를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웨이퍼 크기를 6인치에서 8인치, 다시 12인치로 바꾸는 전환조차 관련 기업들이 약 15년 전부터 합의하고 공동 계획을 마련해야 했다는 설명이다.
무어의 법칙도 자연스럽게 실현되는 물리 법칙보다는 업계 전체의 공동 약속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루이스크라우스는 이를 "일종의 자기실현적 예언"이라고 표현했다. 애플을 비롯한 기업들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반도체를 전제로 제품을 설계하고, 공급업체들이 그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 기술을 개발한다는 것이다.
미국 내 생산 기반 구축에는 설계도만으로 옮길 수 없는 현장 지식과 숙련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루이스크라우스는 고도로 전문화된 공정 지식이 실무자 공동체에 축적돼 있다며, 특정 생산 거점의 이전만으로 공급망 전체를 재현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다만 취재를 거치면서 미국 반도체 지원법의 취지와 실행 구상에는 오히려 더 낙관적인 시각을 갖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바이든 행정부에서 법 시행을 담당했던 마이크 슈미트가 이를 단기 정치 일정에 맞출 사업이 아니라 30년이 걸릴 세대적 과제로 설명했다고 전했다. 미국의 반도체 산업 재건 역시 장기간에 걸쳐 기술과 인력을 축적하는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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