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루나’ 폭락 사태의 핵심 인물 권도형 테라폼랩스 창업자에게 징역 15년형이 선고됐다. 400억 달러(약 59조 원) 증발이라는 사상 초유의 피해를 남긴 이 사건을 두고 일각에선 "기술적 결함에 의한 실패"라는 동정론도 있었다. 하지만 미국 법무부가 작성한 79페이지 분량의 공소장(Indictment)은 이 사태를 단순한 실패가 아닌, 치밀하게 기획된 '금융 사기극'으로 규정했다.
본지는 권도형의 위조 여권 도피 및 체포 과정과 맞물려 공개된 미 검찰의 공소장을 입수, 그 내용을 심층 분석했다. 공소장 초반부 부터 드러난 테라 생태계의 실체는 '혁신'이라는 가면을 쓴 거대한 기만행위였다.
① '알고리즘' 신화의 배신... 실체는 '뒷돈 거래'
권도형은 테라(UST)가 1달러 가치를 유지(Pegging)하는 비결로 독자적인 '테라 프로토콜' 알고리즘을 꼽아왔다. 특히 2021년 5월, UST 가격이 1달러 아래로 추락했을 때 그는 "알고리즘이 스스로 가격을 회복시켰다"며 기술적 우위를 과시했다.
하지만 공소장에 적시된 팩트는 달랐다. 당시 가격 회복은 알고리즘의 작동이 아닌, 권 씨와 결탁한 특정 '고빈도 매매 업체(Trading Firm)'의 인위적 개입 덕분이었다 . 권 씨는 루나(LUNA)를 시세보다 싼 값에 넘기는 조건으로 이 업체에 대량의 UST 매수를 청탁했다.
해당 업체는 이 거래로 10억 달러(약 1조 3천억 원)가 넘는 막대한 차익을 남겼다. 내부적으로 테라와의 거래를 두고 "돈 복사기(money printing machine)"라 칭하며 조롱 섞인 대화를 나눈 사실도 드러났다. '완전무결한 알고리즘'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② "독립기구라더니"... LFG는 권도형의 '사금고'
2022년 1월 출범한 비영리 단체 '루나 파운데이션 가드(LFG)' 역시 투자자를 기만하는 장치였다. 권 씨는 LFG가 테라폼랩스와 분리된 독립적 전문가 이사회가 운영하며, UST 방어를 위한 준비금을 투명하게 관리한다고 홍보했다.
그러나 미 검찰은 권 씨가 LFG와 테라폼랩스를 사실상 동일체처럼 통제했다고 결론 내렸다. 그는 이사회의 승인 절차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자금을 집행했으며, LFG 자금을 테라폼랩스 계좌와 혼용(Commingling)했다. 심지어 LFG 자금 수억 달러를 빼돌려 복잡한 경로로 세탁한 정황까지 포착됐다. '탈중앙화 거버넌스'를 외치던 그는 실제로는 생태계 지분 92%를 장악한 독재자였다.
③ 차이(Chai) 결제 연동의 허구... "서버로 긁어다 붙였다"
국내 투자자들에게 가장 충격적인 대목은 간편결제 서비스 '차이(Chai)'와 관련된 진실이다. 권 씨는 차이 앱이 테라 블록체인을 통해 결제를 처리하며, 이것이 블록체인 상용화의 증거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
공소장에 따르면 이는 완벽한 조작이었다. 차이의 결제는 전통적인 시중 은행 망을 통해 이뤄졌을 뿐, 테라 블록체인과는 무관했다. 권 씨 일당은 일반 서버에서 처리된 거래 내역을 블록체인에 단순히 '복사(Mirroring)'해 넣는 방식으로 투자자들을 속였다. 이 눈속임을 위해 초기 발행된 10억 개의 '제네시스 코인' 중 상당액이 가짜 거래 생성 비용으로 쓰였다.
④ 봇(Bot)이 지배한 미러 프로토콜
미국 주식 가격을 추종한다던 합성자산 플랫폼 '미러(Mirror)' 역시 조작된 무대였다. 권 씨는 미러가 탈중앙화 시스템으로 운영된다고 주장했으나, 실제로는 테라폼랩스 측이 시스템을 비밀리에 통제했다.
그는 제네시스 코인을 자금줄로 삼아 시세 조작용 봇(Bot)을 운용했다. 이 봇들은 미러 내 자산 가격을 인위적으로 조정하고 거래량을 부풀려, 생태계가 활발히 작동하는 듯한 허상을 만들어냈다. 권 씨는 "관리자 키(Key)가 없다"고 거짓말을 했지만, 뒤로는 모든 것을 조종하고 있었다 .
⑤ "규제 당국? 엿이나 먹으라고 해라"
공소장 말미에는 권 씨의 도덕적 해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2022년 5월 테라 폭락 사태 직후, 그는 대외적으로 "수사에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2022년 8월, 측근과의 녹취록에서 드러난 그의 본심은 달랐다.
"그들에게 엿 먹어라(fuck off)고 말할 것이다."
그는 이미 정치적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국가로의 도피를 모색하고 있었으며, "형사 처벌을 피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위조 여권으로 몬테네그로를 빠져나가려던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결국 법의 심판대 앞에 섰다.
미 검찰의 공소장은 이번 사태가 '실패한 실험'이 아닌 '성공한 사기'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거짓 공시와 시세 조작, 자금 유용으로 쌓아 올린 400억 달러의 사상누각. 징역 15년이라는 판결은 '혁신'이라는 미명 아래 숨은 탐욕에 대한 사법부의 준엄한 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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