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의 초대형 고빈도 거래(HFT) 업체 제인 스트리트(Jane Street)가 2022년 테라·루나 붕괴 당시 내부자 정보를 이용해 시장을 조작했다는 혐의로 미국 연방법원에 피소됐다. 테라폼 랩스(Terraform Labs) 파산 관재인이 제기한 이 소송은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크립토 시장 조작의 실체를 수면 위로 끌어올릴 것으로 주목된다.
소송의 배경: 40억 달러짜리 붕괴
2022년 5월, 테라USD(UST)가 달러 페그(1:1 연동)를 상실하면서 자매 토큰 루나(LUNA)가 함께 폭락했다. 한국 투자자들에게도 뼈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는 이 사건은 비트코인을 2만 달러 아래로 끌어내렸고, FTX 붕괴와 샘 뱅크먼-프리드(SBF)의 수감으로 이어지는 '크립토 겨울'의 도화선이 됐다. 테라폼 공동창업자 도권은 지난해 12월 뉴욕 법원에서 사기죄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담당 판사는 이 사건을 "세대를 통틀어 유례없는 대규모 사기"라고 규정했다.
테라폼은 2024년 1월 파산 신청을 했고, 이후 채권자 피해 회복을 위한 청산 신탁(Wind-Down Trust)이 설립됐다. 이 신탁의 관재인으로 선임된 파이퍼 샌들러(Piper Sandler) 구조조정그룹 공동대표 토드 스나이더(Todd Snyder)는 청산 과정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붕괴 수 시간 전, 정확한 타이밍에 빠져나갔다"
스나이더 관재인은 이달 초 뉴욕 맨해튼 연방법원에 제인 스트리트, 공동창업자 로버트 그라니에리(Robert Granieri), 직원 브라이스 프랫(Bryce Pratt)과 마이클 황(Michael Huang)을 피고로 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소장에 따르면 제인 스트리트는 "비공개 내부 정보를 이용해 테라폼 붕괴를 앞당긴 선행 매매(front-running)를 했으며, 이를 통해 테라폼 생태계가 무너지기 불과 수 시간 전 수억 달러에 달하는 잠재적 손실 포지션을 정확한 타이밍에 정리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브라이스의 비밀' 채팅방: 내부 정보 통로의 실체
소장이 공개한 핵심 증거는 비밀 메신저 그룹이다. 제인 스트리트는 늦어도 2018년부터 테라폼과 직접 거래 계약을 맺고 있었다. 그러다 2022년 2월, 제인 스트리트는 과거 테라폼 인턴 출신인 브라이스 프랫을 테라폼 측 전 동료들과 연결하는 창구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프랫은 테라폼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와 사업개발 총괄을 포함한 전 동료들과 단체 채팅방을 개설했다. 이 그룹의 이름은 "브라이스의 비밀(Bryce's Secret)"이었다. 소장은 이 채팅방이 테라폼 내부 정보를 제인 스트리트로 흘리는 통로로 사용됐다고 주장한다.
결정적 순간: 붕괴 10분 전의 대규모 출금
소장이 공개한 가장 충격적인 내용은 2022년 5월 7일의 움직임이다.
미국 동부시간 오후 5시 44분, 테라폼은 스테이블코인 교환 플랫폼인 커브3풀(Curve3pool)에서 테라USD 1억 5,000만 달러(약 2,070억 원)를 전격 인출했다. 이 사실은 시장에 공개되지 않은 내부 정보였다.
그런데 불과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일부 애널리스트들이 제인 스트리트와 연관된 것으로 분석한 암호화폐 지갑이 동일한 풀에서 테라USD 8,500만 달러를 추가로 인출했다는 것이 소장의 주장이다.
다음 날인 5월 8일, 도권은 공개적으로 "이번 인출은 새로운 유동성 풀로 자금을 이동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정확한 인출 시점은 공개된 정보가 아니었다. 제인 스트리트가 이 정보를 사전에 알고 움직였다면, 이는 전형적인 내부자 거래에 해당한다.
이 연속 매도는 붕괴 직전 결정적인 시점에 매도 압력을 가중시켜 테라 생태계의 붕괴를 앞당겼다는 것이 관재인 측의 주장이다.
도권·점프 트레이딩과의 연결 고리
사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5월 9일, 테라USD의 페그가 무너지고 있던 상황에서 프랫은 도권, 황, 제인 스트리트 직원들을 포함한 단체 메시지를 개설해 "비트코인 또는 루나 매수 의향이 있다"는 뜻을 전했다. 이에 도권은 점프 트레이딩(Jump Trading) 공동창업자 빌 디소마(Bill DiSomma)가 테라폼 자금 조달 논의를 위해 제인 스트리트에 이미 연락했을 것이라고 답했다.
또 다른 거대 HFT 업체 점프 트레이딩도 이번 사태에서 자유롭지 않다. 관재인 스나이더는 이미 지난해 12월 점프 트레이딩을 상대로 40억 달러 규모의 별도 소송을 제기했다. 시장 조작, 자기거래(self-dealing), 테라 붕괴 가속화 혐의다.
SBF와 제인 스트리트: 놓치기 쉬운 연결 고리
크립토 역사상 최악의 사기꾼으로 불리며 현재 수감 중인 FTX 창업자 샘 뱅크먼-프리드(SBF)는 제인 스트리트 출신이다. 그의 당시 파트너였던 캐롤라인 엘리슨(Caroline Ellison) 역시 마찬가지다. 두 사람 모두 제인 스트리트를 거친 뒤 알라메다 리서치와 FTX를 공동 설립했다. 업계 일각에서는 SBF가 현재까지도 작동하고 있는 정교한 크립토 시장 조작 구조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라는 시각도 있다.
제인 스트리트 측 반응 "억지 소송"
제인 스트리트 대변인은 블룸버그에 이번 소송이 "절박하고, 돈을 뜯어내려는 노골적인 시도"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관재인 스나이더는 "피해를 입은 채권자들을 대신해 자신의 지위를 악용하고 이득을 챙긴 자들을 상대로 법이 허용하는 모든 방법을 동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토큰포스트 시각
테라·루나 사태는 한국 투자자들에게 특히 깊은 상처를 남겼다. 국내에서도 수십만 명의 개인 투자자가 루나·테라USD에 투자했다가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일부는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했다. 이번 소송이 진행되면서 당시 붕괴의 뒤에 어떤 세력이 있었는지, 그리고 개인 투자자들의 피해가 단순한 시장 실패가 아니라 조직적 시장 조작의 결과였는지가 법정에서 가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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