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BIS여, 닻은 배의 목적이 아니다

| 토큰포스트

국제결제은행(BIS)이 또 보고서를 냈다. 이번엔 블록체인의 구조적 결함을 수학으로 증명했다고 한다. 저자는 BIS 수석이코노미스트 신현송. 프린스턴대 교수 출신의 세계적 경제학자다. 보고서는 정교하고 꼼꼼하다. 읽다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도 적지 않다.

그런데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낯익은 결론이 기다리고 있다.

"중앙은행이 신뢰의 닻을 제공해야 한다."

신현송이 블록체인과 화폐를 주제로 보고서를 낼 때마다 독자들은 비슷한 경험을 한다. 2020년 '암스테르담 은행과 화폐의 거버넌스'가 그랬다. 2021년 '분산원장과 화폐의 거버넌스'도 그랬다. 2023년 '스테이블코인 대 토큰화된 예금'도, 2025년 BIS 연차보고서도 그랬다. 그리고 이번 2026년 보고서가 또 그렇다. 5년에 걸쳐 수식은 바뀌었다. 결론의 좌표는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분석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목적지를 정해놓고 짠 항로인가.

보고서의 핵심 논리는 이렇다. 탈중앙화 블록체인에서 검증자들이 합의를 유지하려면 보상이 필요하고, 그 보상은 이용자의 수수료에서 나온다. 탈중앙화 수준이 높을수록 보상도 커져야 하므로 수수료는 오르고, 이를 감당 못한 이용자는 더 싼 체인으로 떠난다. 그 결과 블록체인 생태계는 필연적으로 파편화된다. 이더리움이 비싸지자 솔라나·트론이 부상한 것이 그 증거라는 것이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보고서가 파편화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동안, 기존 금융 시스템의 파편화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국제 송금은 지금도 SWIFT를 통해 이틀이 걸리고 수수료는 송금액의 수 퍼센트에 달한다. 달러도 연준 계좌의 달러와 페이팔의 달러와 코레스 뱅킹을 거친 달러가 각기 다른 마찰을 수반한다. 아르헨티나 페소, 터키 리라, 레바논 파운드를 쥔 수억 명에게 '신뢰의 닻'은 처음부터 없었다.

보고서는 현실의 블록체인을 이상적 중앙은행 시스템과 비교한다. 공정한 비교는 현실과 현실 사이에서 이뤄져야 한다.

보고서는 중앙은행의 제도적 신뢰를 논의의 전제로 깔고 시작한다. 그러나 비트코인이 왜 탄생했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2008년 리먼 사태 직후, 사토시 나카모토는 제네시스 블록에 그날의 신문 헤드라인을 새겼다. '은행 두 번째 구제금융 직전의 재무장관.' 비트코인은 중앙은행 시스템에 대한 불신에서 태어난 기술이다. BIS가 말하는 '신뢰의 닻'이 세계 많은 곳에서 '통제의 닻'으로 경험된다는 사실을 보고서는 단 한 줄도 다루지 않는다. 베네수엘라 국민에게, 나이지리아 청년에게, 이란 중산층에게 중앙은행은 안전망이 아니라 위험 그 자체였다.

보고서가 제시하는 해법을 따라가 보자. 중앙은행이 운영하는 통합 원장. 토큰화된 중앙은행 화폐. 단일 플랫폼 위의 모든 거래. 화폐의 단일성은 확보된다. 네트워크 효과는 극대화된다. 그리고 모든 거래는 단일 기관에 의해 실시간으로 기록된다.

중국의 디지털 위안은 이미 그 미래를 실험하고 있다. 사용 기한이 있는 화폐, 특정 지역에서만 쓸 수 있는 화폐, 특정 품목 구매를 막을 수 있는 화폐. 프로그래머블 화폐의 편의성은 동시에 전례 없는 통제의 도구가 된다. 보고서는 통합 원장의 기술적 우월성을 논하지만, 그 시스템이 작동할 정치적 환경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설계가 아무리 훌륭해도 운영자를 신뢰할 수 없다면 그 시스템은 위험하다.

BIS는 각국 중앙은행들의 중앙은행이다. 이 기관이 중앙은행 시스템의 우월성을 논증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문제는 그 논증이 학술 분석의 외양을 띠고 각국의 정책 논의에 흘러든다는 점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은행의 CBDC 연구와 금융당국의 스테이블코인 규제 논의가 본격화되는 이 시점에, 국내 정책 입안자들이 이 보고서를 근거로 규제의 틀을 짠다면, 우리는 그 틀이 어디서 왔는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분석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분석이 선택적이라는 것이다. 블록체인이 불완전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앙은행 역시 불완전하다. 우리가 물어야 할 진짜 질문은 따로 있다. 어느 시스템의 실패가 더 감내 가능한가. 그리고 누가 그 실패의 비용을 치르는가.

BIS 보고서는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답은 단순하지 않다. 블록체인이 중앙은행을 대체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두 시스템이 경쟁하고 견제하는 세계가, 하나가 다른 하나를 흡수하는 세계보다 낫다는 것이다. 금본위제가 사라진 뒤 달러가 기축통화가 됐듯, 지금의 경쟁이 더 나은 화폐 시스템을 향한 항해의 과정일 수 있다. BIS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블록체인의 파편화가 아니라, 경쟁 없는 단일 시스템이 만들어낼 안일함이다.

배의 목적은 항해다. 닻은 폭풍을 피해 잠시 머물 때 쓰는 도구다. 유용하다. 때로는 필요하다. 그러나 닻을 내린 채 멈춰 선 배를 두고 완성됐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냥 묶여 있는 배다.

BIS가 설계하는 미래의 화폐 시스템이 어떤 모습이든, 우리는 끝까지 물어야 한다. 그것이 항해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영원한 정박을 위한 것인지를.

[토큰분석] BIS "블록체인은 구조적으로 화폐 분열을 만든다"…스테이블코인 규제만으론 해결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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