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클(Circle)이 하루 만에 22% 떨어졌다. 상장 이후 최대 낙폭이다. 하지만 이날의 충격을 단순한 주가 이벤트로 읽어서는 안 된다. 클래리티법(Clarity Act) 초안 한 장이 스테이블코인 산업의 수익 구조 전체를 흔들었고, 그 여진은 대서양을 건너 대평양을 넘어 서울까지 닿는다.
클래리티법이 무너뜨린 것은 '이자'가 아니라 '비즈니스 모델'이다
지니어스법(GENIUS Act)이 통과됐을 때 업계는 환호했다. 서클 주가는 IPO 대비 750%까지 치솟았다. 그런데 지니어스법은 이미 스테이블코인 발행사가 사용자에게 직접 이자를 지급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업계는 이를 우회했다. 코인베이스는 준비자산(단기 미국채 등)에서 발생하는 이자 수익 일부를 서클로부터 받고, 이를 USDC 보유 고객에게 3.5% '리워드' 형태로 돌려줬다. 이름만 다를 뿐 이자와 경제적으로 동일한 구조, 즉 패스스루(pass-through) 모델이다.
이번 클래리티법 초안은 여기에 칼을 댔다. 미즈호(Mizuho) 애널리스트 댄 돌레프는 새 초안이 "단순히 스테이블코인을 보유한다는 이유만으로 수익을 지급하는 행위"와 "경제적으로 이자에 상응하는 모든 구조"를 금지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키록(Keyrock)의 아미르 하지안 분석가는 이를 더 직접적으로 표현했다. "스테이블코인 채택을 이끌어온 패스스루 모델의 카펫을 통째로 걷어내는 것"이라고 했다. 서클의 핵심 성장 동력이 법안 하나로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일부 애널리스트는 "과잉 반응"이라고 진화에 나섰다. 클리어 스트리트(Clear Street)의 오언 라우는 "실제 상황이 헤드라인만큼 나쁘지 않다"고 했고, 법안의 최종 문구와 시행 방식이 확정되기까지 시간이 있다는 점도 지적됐다. 그러나 시장은 이미 움직였다. 불확실성 자체가 리스크가 된 것이다.
테더에게 이 판은 기회다 — 그것도 아주 큰 기회
이날 테더(Tether)가 빅4 회계법인과 최초 전면 감사(full audit)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한 타이밍은 우연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테더는 오랫동안 감사 불투명성으로 기관 투자자들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 USDT는 시가총액 기준 세계 1위 스테이블코인이지만, 준비금의 구성과 감사 방식에 대한 의구심이 USDC의 차별화 포인트였다. 서클은 "우리는 투명하다"는 점을 경쟁력으로 삼아왔다.
이제 테더가 그 격차를 좁히려 한다. 빅4 감사는 단순한 회계 절차가 아니다. 미국 진출을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다. 모네스 크레스피(Monness, Crespi)의 거스 갈라 애널리스트가 "오늘 서클 주가를 더 강하게 끌어내린 것은 테더 소식"이라고 한 것도 이 맥락에서다.
만약 테더가 전면 감사를 통과하고 미국 규제 당국의 인정을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미국 시장에서 USDC와 USDT가 정면으로 맞붙는 구도가 열린다. 그런데 클래리티법이 USDC의 패스스루 리워드를 막는다면, USDC가 USDT 대비 갖는 수익성 우위는 사라진다. 테더 입장에서는 경쟁자의 무기가 해제되는 동시에 자신의 신뢰도가 높아지는 이중 호재다.
물론 변수는 있다. 테더가 감사를 실제로 완료할 수 있는지, 미국 규제 당국이 테더의 준비금 구성을 수용할 수 있는지, 그리고 미국 내 달러 스테이블코인 시장에서 USDT가 USDC를 얼마나 잠식할 수 있는지는 아직 미지수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테더에게 분명한 전략적 창문을 열어줬다.
한국의 원화 스테이블코인 사업자들이 놓쳐선 안 되는 교훈
서울로 시선을 옮기면, 이 사태는 단순한 미국 뉴스가 아니다.
현재 한국에서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둘러싼 논의는 분주하다. 금융위원회는 디지털자산 기본법 정부안을 준비 중이고, 토스(비바리퍼블리카)는 발행과 유통 양쪽 모두 참여 의사를 밝혔다. 신한은행, 하나금융은 서클과의 협력을 통해 생태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위메이드는 원화 연동 스테이블코인을 위한 블록체인 플랫폼 테스트넷을 공개했다. 카카오, 네이버, LG CNS도 잠재적 플레이어로 거론된다.
이들이 서클·클래리티법 사태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세 가지다.
첫째, '이자형 수익 구조'를 핵심 차별화 전략으로 삼는 것의 위험이다. 서클과 코인베이스가 구축한 패스스루 모델은 규제 환경 변화 한 번에 흔들렸다. 국내 원화 스테이블코인 사업자들도 준비자산 운용 수익을 사용자에게 돌려주는 방식을 경쟁력으로 내세우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한국 규제 당국, 특히 한국은행은 비은행 기관이 은행 유사 기능을 수행하는 것에 이미 깊은 우려를 갖고 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비은행이 스테이블코인으로 예금·결제 기능을 수행할 경우 규제를 우회할 수 있다"고 명시적으로 경고했다.
둘째, 투명성과 감사 체계는 선택이 아닌 생존 조건이다. 테더가 뒤늦게 빅4 감사로 신뢰 갭을 메우려 하듯, 원화 스테이블코인도 출발점부터 100% 준비금 보유·분리 보관·외부 감사·정기 공시가 법적으로 뒷받침돼야 한다는 것이 국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이는 규제 요건을 넘어 시장 신뢰의 문제다. 국내 최초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준비금 논란에 휘말리는 순간 산업 전체가 되돌리기 어려운 타격을 입는다.
셋째, 입법 속도의 문제다. 한국블록체인산업진흥협회는 "상반기까지 끌면 국내 기업들의 기회는 사실상 사라진다"고 경고했다. 지니어스법 이후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글로벌 확산이 본격화되면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자리를 잡기도 전에 달러가 국내 디지털 결제의 사실상 표준이 될 수 있다는 우려다. 서클의 추락이 보여주듯 규제 환경은 언제든 뒤바뀐다. 그러나 제도 공백이 길어질수록 해외 사업자들이 그 빈자리를 채운다.
불확실성은 기회이기도 하다
클래리티법 초안은 아직 최종 법안이 아니다. 의회 논의 과정에서 문구가 바뀔 수 있고, 서클과 코인베이스가 비즈니스 모델을 변형해 적응할 가능성도 남아 있다. 테더의 감사가 순탄하게 완료될지도 지켜봐야 한다.
그러나 이 사태가 보여준 핵심 메시지는 분명하다. 스테이블코인의 경쟁력은 이자 리워드가 아닌 결제 인프라, 신뢰, 그리고 규제 적합성에서 온다. 서클이 22% 떨어진 날, 조용히 빅4 감사 계약을 발표한 테더의 행보는 전략적 교과서에 가깝다. 한국의 원화 스테이블코인 사업자들이 출발선을 제대로 설정할 수 있는 시간은 여전히 있다. 다만, 그 시간이 생각보다 짧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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