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가 이례적인 보고서를 냈다. 스테이블코인 이자 지급 금지가 은행 대출을 보호한다는 주장이 사실상 근거 없다는 내용이다. 수십 페이지의 수식과 데이터로 무장한 이 문건은 겉으로는 학술적 분석처럼 보이지만, 발신자와 발표 시점을 함께 읽으면 전혀 다른 메시지가 행간에 새겨져 있다.
■ 보고서의 진짜 수신자는 누구인가
결론부터 말한다. 이 보고서의 수신자는 학계가 아니라 미 의회다.
CEA의 분석은 명확하다. 스테이블코인 이자를 금지해도 은행 대출은 고작 0.02% 늘어나는 데 그치고, 소비자 후생 손실은 연간 8억 달러에 달한다. 비용이 편익의 6.6배다. 그런데 백악관이 왜 하필 지금, 이런 보고서를 직접 작성해 공개했는가.
미 의회에서 진행 중인 CLARITY법 심의가 그 답이다. 하원은 지난해 7월 이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상원 은행위원회는 팀 스콧 위원장이 올해 1월 마크업을 전격 연기한 이후 일정을 잡지 못하고 있다. 코인베이스 최고법률책임자 폴 그리월이 최근 상원 마크업이 임박했다고 언급하면서 법안의 핵심 쟁점인 스테이블코인 이자 허용 여부가 다시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백악관은 그 논쟁의 한복판에 이 보고서를 던진 것이다.
독립지역은행협회(ICBA)를 비롯한 은행 단체들은 줄곧 주장해왔다. 스테이블코인이 이자를 지급하면 예금이 대거 이탈하고 대출이 수조 달러 줄어든다고. CEA 보고서는 이 주장을 정면으로 겨냥한 반박 문서다. 트럼프 행정부가 직접 나서서 은행권의 로비 논리를 수치로 해체한 셈이다.
■ GENIUS법의 허점, CLARITY법의 딜레마
GENIUS법은 스테이블코인 발행사의 이자 지급을 금지했지만 허점을 남겼다. 코인베이스의 'USDC 리워드'처럼 중개 플랫폼을 통한 수익 지급은 여전히 허용된다. CLARITY법은 이 허점을 닫는 것을 목표 중 하나로 삼고 있는데, 여기서 딜레마가 생긴다.
이자 지급을 전면 금지하면 은행권의 요구를 들어주는 셈이 되지만, 그 근거로 내세운 '대출 감소 우려'가 실증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면 금지의 명분 자체가 사라진다. CEA는 바로 이 지점을 공략했다. 은행권이 내세운 경제적 논거를 백악관 스스로 부정함으로써, CLARITY법에서 이자 금지를 굳이 강화할 이유가 없다는 신호를 의회에 보낸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처음부터 스테이블코인을 달러 패권 강화의 전략 도구로 바라봐 왔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들의 미 국채 보유액은 이미 사우디아라비아를 넘어섰고, 전 세계 스테이블코인 거래의 80% 이상이 미국 밖에서 일어난다. 이자 지급을 허용하면 해외 수요가 늘고, 그 수요가 미 국채로 흘러들어 달러 기축통화 지위를 강화한다. CEA 보고서가 이자 금지 시 해외 달러 수요까지 꺾인다는 점을 굳이 명시한 것은 이 전략적 맥락을 의식한 포석이다.
■ 은행권의 로비와 크립토 산업의 반격
이번 보고서를 둘러싼 갈등의 본질은 기술 논쟁이 아니라 노골적인 이익 충돌이다.
미국 은행들의 평균 예금 금리는 현재 약 2%다. 반면 스테이블코인은 국채 수익률인 3.5% 안팎을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돌려줄 수 있다. 소비자 입장에서 합리적 선택은 명백하다. 은행권이 '대출 감소'를 내세우는 것은 공익적 포장을 한 이익 방어 전략에 다름 아니다.
CEA는 이를 데이터로 정면 반박했다. 스테이블코인 준비자산의 88%는 국채로 운용되다 은행 시스템으로 재유입되고, 실제 신용 창출에서 이탈하는 비율은 12%에 불과하다. 이 12%조차 연준의 풍부한 지급준비금 체제 아래서는 대출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수조 달러의 대출 감소를 주장하려면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현재의 6배로 성장하고, 연준이 통화정책 기조를 전면 포기하는 등 네 가지 비현실적 조건이 동시에 충족되어야 한다.
물론 한계는 있다. 이 모델은 현재의 연준 정책 기조를 전제로 한다. 지급준비금이 축소되거나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예상을 뛰어넘어 팽창하는 시나리오에서는 영향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의 정책 논쟁과는 별개의 미래 변수다.
■ 워싱턴의 전쟁, 서울의 교훈
이 논쟁은 태평양 건너 한국에도 직접적인 함의를 던진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논의가 본격화되면 한국 금융당국과 은행권도 똑같은 충돌을 피할 수 없다. 스테이블코인이 예금을 잠식한다는 우려는 이미 한국 내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CEA 보고서가 보여주듯, 이 우려의 실증적 근거는 예상보다 훨씬 취약할 수 있다. 기존 금융권의 이해관계가 규제 논리를 어떻게 포장하는지 냉정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따로 있다. 스테이블코인이 은행 예금을 일부 대체하는 현상을 막아야 할 위협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소비자에게 더 나은 수익률과 결제 편의를 제공하는 금융 혁신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미국 백악관은 이번 보고서를 통해 후자 쪽으로 무게추를 분명히 기울였다.
CLARITY법 상원 심의가 임박한 지금, 이 보고서는 단순한 학술 분석이 아니다. 트럼프 행정부가 스테이블코인 이자 허용 쪽으로 방향을 굳혔다는 정책 선언이자, 은행권의 반발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논리적 포석이다. 워싱턴의 스테이블코인 전쟁은 이제 결전의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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